설
설
우리나라 민족의 고유 명절 중에 가장 큰 행사이다
조상의 넋을 기리고 가족과 함께 떡국을 먹으며 일년의 건강과 행운을 비는 날이다
설을 쇠면 나이가 하나 먹게되고 설빔이라해서 새옷을 해 입기도 한다
어릴적
어린 마음에 설을 한달 전부터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것은 단순하다
설날이면 검정 고무신이라도 한컬레 얻어 신을 수 있고
밤이며, 곳감이며, 산자며, 떡이며 먹을 것이 일단 풍족하다
그리고 만나지 못했던 일가친척을 만날 수 있었으며
떼를 지어 동네 어른들을 찾아 몰려 다니며 세배를 드리고 나면
먹을 것이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교통이 편리해져서
설 제수 용품등은 정읍 읍내 나가서 다 장만하게 되지만
그때 당시만 해도 고부장이 번창 했던 터라
당연시 설명절이면 인근 고부장을 찾게 된다
시골 집에서 걸어서 10리(4km)를 가야만 했던 고부장은
없는 것 빼 놓고는 다 있는 만물 장이었다
고부장은 단순히 고부면과 영원면 사람들을 상대하는 장이 아니라
인근 줄포면 일부와 소성면, 덕천면을 관할하는 거대한 상권이었다
지금처럼 상주하는 상설시장은 아니었지만
5일마다 찾아오는 고부장은 대단한 상권과 인파를 형성 했다
어머니를 따라 고부장에 가면 우선 이 촌놈의 관심사는
검정 새 고무신을 사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다
겨울이면 헌 고무신의 경우 다 닳아 물이 새기 마련이고
당시야 변변치 않은 꿰맨 양말이라서 치명적일 수 밖에 없다
어떻게든 어머니한테 사정해서 고무신을 하나 얻으면
그 다음은 '독고리사츠'와 '줄무늬 내복'이 욕심이 생긴다
지금처럼 월급을 기반으로 생활하는시절이 아니라서
일년 농사지어 쌀 팔고, 팥팔고
하루 하나정도 밖에 생산되지 않는 계란을 모아 시장에 내다 파는 게 전부여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인지라
어머니의 쪼개쓰는 경제정신은 지금은 상상도 못한다
설날 아침
할아버지와 함머니가 계셨던 당시
우선 큰 방의 앞문을 활짝열고 마루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먼저 새배를 올리고 나면
나머지 손주들이 줄줄이 서서 큰 어른께 새배를 올린다
그리고 그 다음차례가 아버지와 어머니 였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새배는 큰 문을 닫고 방안에서 하게된다
그렇지만 지금 아이들처럼 새배돈은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다
이윽고 작은 할아버지 댁과 작은 아버지댁을 찾아 새배를 올리고
거기서 주신 떡국으로 한 살 더 먹는 것을 기념한다
집안식구들이 모두 모이면 아침 차례를 지낸다
4대의 식구가 모이면 30여명이 되어
방안이 좁은 우리 집 차례는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큰방의 두문을 다 열고 차례를 지내곤 했다
차례가 끝나고 나면 우리의 관심사는 누가 곳감을 더 많이 차지 하느냐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 달리 곶감은 잘해야 맛을 볼 수 있고
조상의 덕으로 복을 받는다는 '음복'이라해서 밤 한톨이 전부인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그 곶감은 동네 어린 새배객들에게 주어야 할 마음의 양식으로 써야 하기 때문에
작은 소쿠리에 담아 할아버지가 계신 큰방 시렁에 올라가 버린다.
각 집에서 차례를 마치고 아침 식사가 끝나면
동네어귀에는 또래 아이들끼리 모이기 시작한다
그건 오늘 새배를 어느 집부터 갈 것이며
작년에 누구네 집에 가면 뭣이 나오고,
뭣이 맛 있더라 하는 정보 교환의 장이 되기에
거기서 얻는 정보가 새배사냥(?)을 나가는데 많은 도음이 된다.
애들 욕심으로 너무 서두른 경우에는
다른 집 차례도 지내기도 전에 새배한다고 방문한 적도 있다
이윽고 삼사오오 무리를 지어 어른들이 계신 집은 거르지 않고 다 다니면
아침에 천신 못했던 곶감이며, 산자며 먹을 것이 골고루 나온다.
지금은 다시 볼 수 없는 고구마로 고은 조청에 떡을 찍어 먹는 맛은
지금 과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동네 순회가 끝나고 나면 하루의 자평과 함께 거두어 들인 수확(?)에 대한 대조를 이룬다
그때 그래도 가장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아랫돔 기와집에서의
걸게 차린 한 상의 예우는 아이들의 세상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며
계속해서 회자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