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지금

나의 공직생활- 한여름의 방황

goldenfiber 2007. 5. 18. 13:25
 

나의 공직생활-한여름의 방황


평온한 전원풍경으로만 비쳐졌던 면서기의 모습이 촌놈에게 시작되었다.

1979. 7. 13 첫 근무지는 내 고향옆 집사람의 고향이었던 고부면에서 시작되었다.

가자마자 시작된 것은 병충해로 얼룩진 들판의 핵폭탄 자국을 치유하는 멸구박멸의 후치왕, 키타진입제를 나르는 일이었다.

중국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온 멸구는 자리만 잡았다하면 둥근 멍석마냥 핵폭탄이 투하된 히로시마처럼 되어갔고 이를 막아내는데 전방에 서야 할 사람이 말단의 행정력이었다.

 

당시만해도 지방행정, 일선조직의 가장 비중을 많이 차지하고 있는 분야가 새마을과 함께 농산분야였기 때문에 밀어부치면 안되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녕 현장에서 움직이여야할 농민은 날씨가 더웁다는 이유로, 일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농약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들판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죄많은 면서기들이(?)나서 농협에서 농약을 수령해다가 마을마다에 실어다 부치는 일을 전담하고 나섰다.

 

당시의 병충해 방제 실적은 시중에서 아무리 농약을 많이 구입해다가 살포했다하드래도 필요가 없었고 오직 단협에 비치하고 있는 농약재고를 털어내는 일만이 방제실적을 잡아주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면서기의 고충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고 나의 면서기는 시작하자마자 때아닌 등짐을 해야 했다.

한 BOX에 30㎏정도되었으니까 차에 싣는 상차와 차에 내리는 하차를 반복할때마다 제대로 단련되지 못한 이내 몸은 한 더위와 함께 숨이 꽉꽉 막혀왔다.

그리고 저녁에는 낮의 피곤을 잊기위하여 선배들 따라 11시가 넘어서야 허기와 피곤함을 막걸리로 달래곤 했다.

 

난생 처음 입에 술을 대보았다.

쓰디쓴 그놈의 술을 뭐땀시 마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평화롭다못해 그림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상상의 나라에 대한 공직의 희망은 여지없이 깨지고 ‘내가 왜 이길을 택했는가’하는 슬픔이 낮의 피로와 밤의 술과 뒤범벅되어 여러 날을 괴롭혔다.

선배들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야기한다 

“나도 처음에는 다그랬어”

하는 말을 위안삼아 견디기 어려운 세월을 보내야만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하나보다.

그리고 그동안 참지 못해 괴로워했던 일들을 서서히 잊어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면서기의 틀을 잡아가기 시작 한 것이다.

전형적인 면서기의 틀이 말이다.

내가 생각하던 방향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원하는 방향이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