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공직생활- 행여사망자 가매장사건
나의 공직생활- 행여사망자 가매장사건
지방행정 공직자들이 일선에 근무하다보면 한번쯤 겪는 일이 있다
그것은 행여사망자를 처리하는 문제이다
1981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퇴근 시간을 넘긴 시간에 경찰 지서 차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관내 00리 00저수지에 익사체가 발견되어 인양했다는 전언이었다.
당시 촌놈은 면 사회업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지서직원들과 함께 현장을 가야 했고 그 익사자를 우선 가매장하는데 참여해야만 했다.
낮에 이미 경찰에서 신원확인을 위한 지문채취는 끝났다고 했으나 그 악취로 인해 정년을 며칠밖에 남지 않은 취해버린 지서 차석의 언행으로 봐서 낮에 지문채취과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신참 순경들에게 시켰더니만
“경찰 그만 했으면 했지 익사체 지문채취는 못하겠소”
라며 다들 피해버리자
내일 모레면 그만둘 차석이 과거의 경험을 되살려 미리 대낮에 소주 몇 잔을 들이키고 지문채취 작업을 나섰단다
시기가 여름이고 익사한지 이삼일 지난뒤 발견된지라 몸은 부풀대로 부풀어 있고 쉬파리는 제 세상을 만난 듯 저공비행을 하여 이미 부패하기 시작한 시체에 대한 지문채취는 현장을 보지 않았지도 감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어 보였다.
마을로 간 우리 일행은 우선 리장을 찾았지만 다들 들에서 아직 들어오지 않은 마을 사람들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기다리기를 두어시간 지났을까 어둠이 깔리는 여덟시가 되어서야 하나 둘 모여든 동네사람들과 함께 현장으로 갔다
우선 익사자를 옮길 도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명 ‘당까’(들것)라고 하는 것을 만들기 위해 가마니 2장을 준비하고 소나무를 두 그루를 베었다.
그리고 가마니 밑 양귀퉁이를 잘라 소나무를 끼워 들것을 만들었다
이내 좁은 논두렁길을 따라 현장에 도착하여 그 익사체를 들것에 싣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냄새는 진동하고 쉬파리는 떼 지어 날으고 이미 어두어져 버린 날을 원망하였지만 뒤로 저쳐진 머릿결, 퉁퉁부어 있는 온 몸, 도저히 들것에 옮기는 작업에 그 분과 손잡고 직접 참여하기에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일단 들것에 옮겼으나 들것을 드는 일은 피할 수 없었다.
뒷쪽을 자원하여 나선 나는 차마 드러누운 모습을 볼 수가 없어 헌가마니를 덮고 이동했지만 우리일행이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발은 뒤에서 걷고 있는 나의 오금을 저리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일반 가정에서 상을 당했을 때 바로 사체를 교정시키는 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뻣어진 팔은 들것이 흔들때마다 어둠침침한 초승달의 달빛사이로 덮은 가마니를 제치고 뛰쳐나와 들고 가는 우리 일행을 깜작 놀라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리고 왜 이리 무거운지 사람의 몸이 많이 나가야 80키로 정도 일진데 젊은 사람 넷이서 들었는데도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가매장에 대한 검사 지휘가 늦게 떨어진 덕분에 야밤에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 분을 가장례(假葬禮)를 치러야하는 우리네 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고 현장에서 우리가 가매장할 장지(공동묘지)와는 약 1키로 남짓...
익사자의 그 발놀림의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잠시 쉬는 틈을 타 자리를 앞으로 옮겼다. 그래야만 그 모습을 보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 혼자 빠진 수렁처럼 이제는 그분의 머리카락이 내 손목을 자극하고 있어 한 발 한발 옮길 때마다 온몸이 오싹 오싹...
무려 30분이상을 이동하여 마을 사람들이 미리 준비해 놓은 목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아 일단 가매장을 했다. 그리고 넉살좋은 경찰 한사람이 그분의 명복을 빌었다.
여름인지라 혹시 비라도 내리면 빗물이 스며들까 바 봉분을 단단히 다져야만 했다.
언제 가족이 그분을 찾을지는 모르지만 작업을 마쳤을 때는 서녁에 반달이 걸려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고 저녁 9시 30분쯤 공동묘지에서의 작업을 마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네 주위를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 마지막 가면서 남기고 간 냄새로 아마 직접 그 체험을 해본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인간의 냄새였다
우리 일행은 일단 작업을 마무리하고 사무실 가까운 소재지로 왔다.
그 상황을 잊기위해 마늘을 안주삼아 소주를 들어 마시고, 마늘을 코에 넣어보기도 했으나 그것은 아무 부질없는 짓이었다
취할대로 취한 몸을 이끌고 이미 음주운전이 되어 버린 채 사이카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에도 촌놈의 코에 남겨진 냄새는 1주일이상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없어진 것 으로 기억된다.
돌아가신 분은 생각지도 못한 객사의 참변을 당하고 가족의 애도도 받지 못한 채 생면부지의 우리네 손에 의해 장례의 예도 갖추지 못하고 외롭게 공동묘지에 묻히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후 촌놈은 군대관계로 휴직을 냈었고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가족이 나타나 매장된 현장에 가 보았으나 육탈이 되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후에 이장하기로 하고 그때 수고 해주었던 직원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긴체 돌아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분은 평소 약주를 좋아 했는데 그날 친척집 경사에 얼큰하게 취한 상태에서 도보로 평소 지름길이었던 그 길을 택한 것이 생사를 갈라 놓았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있을 한번쯤 닥칠 법한 일이지만 야밤에 가매장하던 생각을 지금도 생각 하노라면 당시의 상황이 필름처럼 흘러가곤 한다
지금이야 일단 행여 사망자가 발생되면 의료원으로 안치하고 가족이 연락되면 인도하고, 그렇지 않으면 검사 지휘를 받아 가매장하게 되어 있지만 당시만 해도 경찰과 함께 사체를 밤새 지켜야할 때였으니까.
*행여사망자 : 신원을 알 수 없는 타지역사람이 관내에서 사망하여 그 가족이 나타나기까지 관리되는 사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