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공주 황새바위 순교성지

goldenfiber 2009. 3. 1. 08:36

 

 성지의 대다수가 그렇듯 이곳 공주도 과거의 관공서 위치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성지가 자리잡고 있다.

전주가 그렇고, 대구, 해미, 곡성 등등 많은 성지들이 조선시대의 관공서였던 감영이나 군청, 현청 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처절한 처형이 이루어진것이다 

당시의 지역 수장에게는 요즘은 상상할 수 없는 입법, 사법, 행정의 초법적 지위이자 3권이 주어져 있어 중앙의 지시 한마디이면 모두 잡아들이는 구금과 재판, 처형까지

절대적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순교자의 목숨은 그들의 손에 좌우지 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곳 황새 바위도 감영과 감옥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제민천이 이웃하고 있어서 처형을 한 시신들을 처리하기에 용이한 이 곳을 택했으리라 추정된다

 

자료에 보면 충청도 지방에서도 주로 당시 관청이 위치 하고 있었던 이곳 공주와 병마 절도사가 있었던 해미, 그리고 영장이 주재하던 홍주(현 홍성)에서도 주로 관아 인근의 형지나 옥안에서 신자들을 처형한 것으로 보인다. 

 

 

 

 (당신 감영터는 앞에 보이는 봉황산자락에 있었고, 감옥은 교회가 위치한 곳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다 - 최비오 신부님)

 

최근까지도 공주 형무소가 있었던 자리로

 예로부터 황새가 많이 서식했다하여 '황새바위' 또는 목에 커다란 항쇄 칼을 쓴 많은 죄수들이 이곳에서 처형 당했다하여 '항쇄바위'라고 불리는 등

이 곳 순교터는 불러지는 지명과도 결코 무관치 않다.

 순교자들의 시신들이 버려 졌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지금은 주택가가 들어서 있다

당시  앞에 있는 제민천은 피로 넘치고 건너편 공산성(公山城)은 처형 장면을 구경하러 나온 인파로 흰 옥을 입은 사람들이 병풍모양을 이뤘다고 전한다

 마침 성지 주임 신부님이 서글서글한 인상과 입담으로 순례객들에게 성지에 대해서 친절한 안내가 있었다

그리고 최비오 신부님과 우리 부부가 함께 한 컷

 무덤경당

 

 순교탑,

( 돌로 된 형구틀, 수많은 순교자들이 이돌에서 목이 부러져 형장이슬로 사라져 갔다)

당시의 처형방법은 원칙적으로 정법(正法) 곧 칼로 목을 베는 참수형이었으나 당시의 주검은 장형(杖刑), 큰 돌에 구멍을 뚫어 줄을 당겨 처형하는 교수형, 옥사(獄死), 아사(餓死) 등 다양한 방법이 사용 되었다. 

 

 12사도를 상징함과 함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을 형상화한 묘 비석,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다름 없다는 신부님의 부연 설명이다

 경당

 공산성에서 바라본 황새바위 성지,

순교탑 탑신만 조금보이고 우측 하단에  푸른 기와집이 성지안내소이고, 뒷편으로 흰색을 띠는 건물이 경당이다.

황새바위 바로 옆으로 제민천이 금강으로 흐르고 있다.

 

이곳 황새바위 성지에서 순교한 순교자는 공주감영록을 통해 공식적으로 확인 된 순교자만 248위로써,

신유박해(1801)때 이존창 루도비꼬에서부터 1879년까지 무려 100여년 간 숨져간 순교자가 줄을 이었으며,

그 출신지도 충남과 충북, 전주, 경기도 등으로 자료가 없는 순교자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다

이들중 손자선 토마스 성인이 103위 성인품에 오르셨고,

순교자 중 최연장자는 84세의 남상교 아우구스티노(성 남종상 요한의 부친, 1866년 1월 옥사)이고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는 10살 밖에 안 되었던 김춘겸의 딸(1966년 4월 교수형)있었다.

 

따라서 신앙을 위해 몸 바친 선조들의 정신을 받들고 우리와 후손들에게 자랑스런 신앙터전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부지 매입과 대성당, 사제관 그리고 피정의 집 등을 계획하고 그 정성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