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언부언

10월 10일

goldenfiber 2009. 10. 25. 11:17

10월 10일


10월 10일이면 우리는 쌍십일을 먼저 생각케 한다.


1911년 10월 10일은 청나라의 시달림 속에서 손문을 주축으로 한 혁명군이 무창에서 청나라 타도를 위해 행동을 시작한 날이며

그 결과 신해혁명에 의해 청나라가 무너지고 손문이 임시대총통이 되었다.

그래서 예전에 보면 시네 중국집에서는 10월 10일이면 큰 명절처럼 지내곤 한다


그러나 10월10일은

촌놈에게 두 가지의 기억을 떠 오르게 한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1993년 10월 10일 일요일 오전 10시 10분


살다가 갑자기 불청객이 되어 버린 셋째 형의 삼오제를 지내고 시골 집에 있던 차에 사무실에서 비상을 걸렸다


마른 하늘에 날 벼락이라고 부안군 위도에서 여객선 침몰사고가 나서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빠졌다는 것...


갑자기 떠나간 형에 대한 충격도 컸지만 관내에서 대형사고가 발생 했으니 부랴부랴 사무실에 복귀해야 했다


희안하게도 10월 10일 10시 10분

문제의 서해 훼리호는 이날 오전 9시40분께 위도를 떠나 왔다

정원 210명에 362명을 태운데다가 액젓등 화물도 많이 적재되어 처음부터 사고를 예고 했었다


사무실에 복구한 우리는 일단 직원들을 비상소집하고 비상팀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지방행정을 총괄하는 우리 부서는 부안 현지와 중앙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었고

사고가 대형사고인 만큼 우리부서에서 전담하기엔 너무 벅차 나머지 관련부서들이 참여한 종합상황실이 구성되어 분야별로 추진되었다


최종적으로 우리부서가 맡은 임무는

이 사고와 관련된 사람이 몇명인가를 파악하는 것이고, 과연 몇명이 바다에 빠졌는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 숫자를 파악하기 위해 논의 끝에

방송등 언론을 통해서 전국적으로 이시기에 집을 나가 연락이 되지 않는 실종자 접수를 받아 하나,하나 규명해 나가는 작업을 맡았다


방송이 나가자 전국적으로 연락이 되지 않는 실종자는 다 접수가 되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500여명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과연 그 배에 500명이상이 승선할 수 있을까

그래서 실종자로 접수된 이를 해당 시도와 자료를 주고 받으며 하나씩 사실확인을 통해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경찰간부출신 도백의 지시에 따라서 접수된 실종자 명단은 절대 공개하지 말라는 언명이 있었기에

실종자 명단을 공개하지 않는다고 취재하는 언론사의 기자들과 욕 짓거리까지 같이해 가면서 실종자 명부를 관리했다


이는 사후에 해난사고 특성상 전원 인양이 불가능한 점을 악용하여 실종자를 못 찾은 것으로

하여 보상금을 노리는 사람들의 문제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경험많은 경찰 간부출신다운 방안이었다


실종자 신고는 각가지 유형이 접수 되었다

실제 훼리호 사고로 익사한 사람을 신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부간에 싸움하고 집나간 사람,

공부 안한다고 아버지한테 꾸중듣고 집나간 사람,

친정간다고 갔는데 소식이 없는 사람,

아예 이 사고와 관련없이 오래 전부터 실종된 사람 등등


그러나 실종자 정리과정에서 아쉬운 대목이 많았다

실종신고한 사람이 집에 돌아 왔는데도 우리부서에는 연락을 하지 않아서

그 상황을 모르는 우리는 그들을 추소문하는 번거러움과 해야 할일 많은데도 시간 낭비를 하는 것들은 정말 안타까웠다.


사고와 관련된 실제 사망자와 접수이후 집에 돌아오거나

실종자 한사람을 가족 여럿이 신고하여 이중삼중으로 기재된 동인이명인 사람들을 하나씩 확인하여 명부를 지워나가는 작업은

사고가 마무리되는 날까지 20여일동안 24시간 교대하면서 진행되었다


군부대가 동원되고 범정부차원에서 나선 서해훼리호 참사 사후 작업은 시간이 갈수록 해결의 실마리를 잡아 나갔다


최종적으로 11. 2일 실종되었던 사람을 인양하면서 상황은 종료되었다

무려 292명의 목숨을 앗아간 서해훼리호 참사는 세계 해난사고 사상 실종자 전원을 인양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 사고 당시 사망자와 관련된 뒷 이야기들이 무성했다


촌놈의 주변에서도 비명에 횡사한 사람이 있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했던 분이 부인과 함께 대명천지에 객사하고

특히 안타까운 것은 위도를 부부간에 놀러 갔다가 갑자기 남아 있는 자식들을 고아로 만들어 버린 가족들의 사연들은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메이게 했다


올해는 내일(10.11, 음력 8.20)이 형의 제사날이니

13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음력과 양력의 차이가 생겼음이 나타났지만 매년 이맘때면 셋째형 제사를 모시면서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 난다.

정원을 무리하게 초과하면서 승선시킨 것이 화근을 자초한 이 사고는

위도주민을 포함해서 292의 위도를 방문했던 낛시객들, 관광객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말았다


참사 2년후 위령탑을 세우고 지금은 매년 위도 현지에서 추모행사를 치루고 있으며

그 참사에 따른 위도종합개발계획등이 마련되는 듯 그들의 넋을 위로하는 가 했더니만 순환도로 등 몇몇사업만 추진되고 그 후론 잠잠하다.

더군다나 위도는 방폐장의 홍역을 단단치뤄 지금도 그 후유증이 남아 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