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다산초당(茶山草堂)

goldenfiber 2009. 11. 22. 23:33

 

 (다산초당, 지금은 초가집이 아니고 1958년 강진 다산 유적보존회에서 기와집으로 복원하였다 )

다산 정약용, 근대 실학자이었던 그는 1801년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이 곳 강진으로 유배에 처해져  18년간 유배생활을 한다

 (다산초당 현판 -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

 

 (동암- 초당에서 남동쪽에 위치한 건물로 1976년에 복원되었으며, 이곳에서 많은 저서를 집필하였다, 다산동암이라는 현판은 다산의 친필을 집자 모각한 것이다))

 (서암- 다산의 제자들이 주로 기거했다는 건물 1975년 복원 하였다)

 (천일각-다산이 흑산도로 유배간 둘째형 '정약전'을 그리며 심회를 달랬던 곳으로 강진만이 보이며 정면과 측면이 한칸씩이다)

 

 (다조(茶조)- 다산이 차를 끊이는데 사용한  부뚜막과 같은 돌이다)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 초당 옆에 있는 연못으로 1808년 봄 다산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바닷가의 돌을 가져다가 만든 연못으로 연못 가운데 조금만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하고 나무 홈통을 이용하여 산속물을 떨어지게 만들어 '비류폭포'라 하였다)

 (약천(藥泉)- 초당 뒤에 있는 샘으로 다산이 직접 수맥을 잡아 만들었으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항상 맑은 약수가 솟아나오고 있다)

 

 

 

 

 유물전시관에서 다산초당으로 넘어오는 고갯길이 옛 시골길을 생각케 한다 

 (다산 수련원)

 (다산유물전시관)

 

 

 (두충나무 숲- 다산 유물전시관에서 다산초당을 가기 위해서는 이곳을 거쳐야 한다)

 

 (다산 초당에 오르는 길에 오롯이 빛을 발하고 있는 단풍)

 

다산 정약용은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으며 이곳 강진에서 유배 18년을 보내면서 목민심서 등 수많은 명저를 남겼다

다산은 1762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일명 양근 마재, 현재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정재원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성호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을 집대성한 당대의 최고의 인물로 평가된다

 

다산은 네형제 중 막내로 맏형이 약현 그리고 둘째 약전, 셋째 약종이 있다

천주교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770년대 후반으로 천주교 서적을 접하면서 그 오묘한 진리에 매료되기 시작한 그는

1783년 형수의 제사를 모시고 형 약전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는 배 안에서 이벽(李壁)과 천주교에 관해 토론을 벌이고

1784년 수포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 이듬해 을사추조 적발 사건이 나자 척사의 태도를 취하고

1791년 진산사건으로 윤지충과 권상연이 죽음을 당하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거세지자 그는 배교의 뜻을 명백히 한다

 더군다나 1797년 다시금 서학도(西學徒)로 지목받자 자명소까지 올려가며 신앙을 부인하고

1799년에는 척사 방략을 저술해 천주교에 대한 배격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로 다산은 체포되고 이 과정에서도 그는 천주교를 철저히 부인하고

권철신, 황사영 등 자신이 알고 있던 교회 지도자들을 고발하기도 하지만, 끝내 그는 강진으로 유배의 길을 떠나고 만다

강진으로 온 다산은 처음에는 정착하지 못하고 강진 동문 밖 주막과 제자 집등을 전전하다 유배 8년만인 1808년 다산초당으로 이거한다

 

다산이 천주교와 연을 맺게 되는데는 다산을 둘러싸고 있는 인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맨 처음 천주교에 대해 설명을 한 사람은 한국 천주교 창립의 주역 이벽으로 다산의 맏형 약현의 처남이었고,

한국최초의 천주교 영세 신자였던 이승훈은 다산의 누이와 결혼한  다산의 자형

황사영의 백서사건의 장본인인 황사영 역시 맏형 약현의 사위니 다산에게는 조카 사위가 된다

더군다나 진산사건으로 효수된 윤지충은 다산의 외사촌 형이었고,

바로 위에 형인 약종은 한국최초의 천주교리 연구회장을 지내는 등 다산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온통 천주학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다산은 포항 장기로, 둘째형 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를 떠나고 셋째형은 옥사한다

9개월 후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서울로 다시 불러 들여진 다산은 조사를 받게되고 본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다시 형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길을 떠나게 되는데

약전은 끝내 해배되지 못하고 흑산도에서 숨을 거두고, 다산은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면서 형 약전을 많이 그리워 했다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의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칭한다

이는 아마 자신의 형 약종과 자형 이승훈이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이미 순교의 길을 택한 데 비해

자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뜻의 '여유당'이라는 호로써 자신의 부끄러움을 표현 한 것이라 생각된다

 

고향을 등지고 산천이 두번이나 변했을 법 한 18년 세월을 쓸쓸하게 지내고 난 뒤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 온 다산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굳건한 신앙을 보여준다

유배중이던 그는 그의 본심을 버리지 못하고 1811년  성직자 영입운동에 참여하고 유배 이후 교회로 돌아 온다

자신의 배교를 크게 반성한 다산은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묵상과 기도로 살아 간다

그는 이런 참회와 기도의 생활 가운데 '조선 복음 전래사'를 저술했고 박해로 순교한 동지들의 유고를

이승훈의 호인 만천을 따 '만천 유고(蔓川遺槁)'라는 제목으로 정리하였다

특히 그는 만천유고에서 이벽의 '천주공경가'와 '성교 요지'와 같은 주옥같은 글들을 담아 낸다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배교 한 뒤 말년을 회개와 참회로 참된 진리에 자신을 바친 다산은

죽기 직전 중국인 파치피코 유방제(劉方濟) 신부로부터 병자성사를 받고 1836년 7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겨울의 초입

초당가는 길은 쓸쓸하다 못해 초겨울의 찬 바람이 웃깃을 파고 든다

그의 자취가 남아있는 다산초당의 4경이라고 하는 '정석', '약천' 그리고 '다조' '연지석가산'과  때도 모르고 피어오른 빨간 동백꽃만이

찾아 온 사람들을 반기며 쓸쓸한 초겨울을 맞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