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신부의 첫 사목지 은이공소
(은이공소 성당 안)
은이 마을은 말 그대로 '숨은 마을'(隱里)이었으리라
지금이야 대형차량도 공소 마당까지 들어 가도록 도로가 갖춰져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이 곳 은이 공소는 보통 사람들이 쉽게 번잡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으며 목숨을 내 걸고 주님과 함께 하려는 신자들에게만 개방된 곳이다
은이 마을은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였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세례를 받고, 사제 서품을 받은후 귀국하여 행한 첫 사목지이라는 점에서
교회에서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금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초라한 공소로써 많은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지만
조만간 주님의 축복속에 김가항 성당 복원 등으로 거듭 태어 나리라고 기대 된다
초라하지만 믿음의 기운으로 충만한 공소의 작은 성당은 온기가 가득했고, 좌우로 잘 진열된 각종 교회 자료들이 이 곳 은이 공소가
당시 경기도 지역의 신앙의 중심지 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바로 이곳에서 김신부는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신자들과 미사를 봉헌했고 체포되기 직전 공식적으로 최후의 미사를 드렸던 곳이다
이 공소와 관련된 또 한명의 성인은 바로 모방 나 신부인데 그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5년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병사하자 그 뒤를 이어 부주교로서 조선 교구를 맡게 된다
당시 몽고에서 한문 공부를 하며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이미 모든 사목권한을 위임받은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준비했던 길을 따라 조선 입국을 서둘러 국경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나고 1836년 초 마침내 조선 땅을 밟음으로써
파리 외방 전교회원으로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 된다
부활절을 서울에서 지낸 모방 신부는 본격적인 사목활동에 나서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의 교유촌을 방문하고 2백여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때 그의 사목 활동의 중심지가 바로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에 위치한 은이 공소였다(현재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김 신부도 이 곳 은이 공소에서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장래 조선교회의 동량으로써 선택되어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다
모방신부는 1837년에 이르러서 샤스탕 신부를 맞아들여 함께 사목활동을 하므로써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 범 주교가 입국할때는
이미 조선교구의 교세가 상당히 성장해 있었던 상태였다
하지만 모방 신부는 1839년 기해 박해 당시 앵배로 범 주교, 샤스탕 신부와 함께 그해 9월 홍주 근처(현 홍성)에서 스스로 잡히는 몸이되어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된다
은이 공소는 이웃 한덕골과 골배마실등과 함께 160년 전 교우촌을 형성했던 곳으로
이 곳 형제봉 아래는 박해 때문에 떠돌게 된 경기도와 충청도 교우들이 모여 비밀리에 신앙공동체를 이뤄던 곳이다
지금 은이공소는 김신부 흔적과 김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았던 중국의 김가항 성당을 이곳에 복원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양지 성당을 중심으로 많은 정성들을 모으고 있으며
미리내 성지와 도보로 2시간 55분, 골배마실 성지와는 도보로 50분 거리에 위치한 은이 공소는
많은 순례객들이 도보 순례 코스로 활용되는 곳이기도 하다
은이성지를 가는 길은
수원방면에서 이천방면으로 42번 국도를 달리다가 양지4거리를 못미쳐 우측으로 들어가
한적한 길을 따라 산쪽으로 올라가다보면 은이성지 표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