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문 요셉 묘
윤봉문 요셉은
영일군 기계면 지촌리가 고향인 윤사우(스타니슬라오)의 둘째 아들로 부친이 영세 입교후 양산 대청에서 숨어 지내다가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이 곳 거제도 진목정(옥포리)로 피신하여 옥포 동수 진진부를 우연히 만나 권면하여 입교시킨다
그후 진진부는 윤봉문 요셉을 사위로 맞이하였고 윤 요셉은 치명하기 까지 이 곳 옥포에서 살았다
윤봉문 요셉은 거제의 사도로서 형 경문과 함께 교회 회장직을 밑아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쓰는 한편 수계(守誡)에도 열심이었다
그리하여 1887년 11월 병인 박해후 처음으로 당시 대구본당 초대 신부였던 김보록 신부가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거제를 방문하자
그는 자신이 가르치던 예비자 15명을 영세입교 시킨다.
그러던 차에 이 지역에도 공식적인 박해가 아니 사사로운 탄압의 바람이 일어 윤봉문은 1888년 2월 진수부, 주남이, 한상필 등과 함께 옥포에서 체포되어 거제 관아로 끌려간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모두 뇌물을 주고 풀려나지만 윤봉문은 천주학의 괴수라고 해서 통영으로 압송된다.
수차례에 걸친 문초와 혹형을 받으면서도 그는 배교와 밀고의 유혹을 물리치고 신앙을 지키자 다시 진주로 압송되게 된다.
상부의 지시로 굵은 칡넝쿨로 발목을 묶인채로 끌려가는 이 길에는 칡넝쿨에 살이 뭉개지고 피가 흘러 참혹하기 가 이를 데 없었다고 전한다
진주에 도착하여 3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과 배교를 강요다하고도 이를 뿌리치며 감옥에 갇혀있던
그는 1888년 2월 22일 올가미에 목을 졸려 순교했으니 그 나이 37세였다.
순교자의 유해는 장 도민고 회장의 주도아래 장재실(長在谷) 교우들에 의해 공소 뒷산에 가매장 되었다가
10년후인 1898년 옥포 본당 성낙진(바오로)이 교우들과 함께 순교자 유해를 이곳 거제도 옥포 앞산 족박골(足泊谷)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윤요셉, 본디 양산사람으로 거제에 와서 살다가 무자년 수군난에 통영 포교에게 잡혀 중영에 잡혔다가 진주 진영으로 이수하였더니
영장 구연팔이 물어 가뢰되 ‘ 너 무엇을 하느뇨’ 답 왈 ‘천주교를 합니다’
영장이 또 왈 ‘ 너 천주교를 하면 읽어봐라’ 하거늘 천주교 십계를 읽으니, 영장 또 왈 ‘너 천주교를 누구에게 배웠느냐’
요셉이 답 왈 ‘양대인에게 배웠습니다’ 영장이 가뢰되 ‘너는 윗관(上官)에서 도둑으로 죽이라는 분부가 있는 고로 내가 죽이겠다’ 하자
요셉이 답하기를 ‘지금 천주교 하는 사람을 죽일진대 영문(營門)으로 초문(初問 )하여 회문(回聞)하여 죽이소서‘하니
영장이 대답하기를 ’네 말이 쓸데없다‘ 하고 옥중에서 가만히 교(絞)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37세요, 때는 무자년 2월 22일이라
- 병인치명사적 18권 기록에서 -
그러나 순교자 묘소를 찾는 길은 그리 쉽지 않았다.
우선 옥포성당을 찾아 위치를 물어 거제소방서 맞은 편, 가파지른 골목길을 올라야 했다 거기서 밭일하시는 분에게 다시 물어 길을 찾았다
그 흔한 순교자 묘소를 알리는 팻말조차 없었으니 순교자 윤봉문 요셉은 오늘도 외로운 길을 가고 있었다.
마을에서 10여분 좁게 나 있는 주민들의 산책코스로 접어들자 십자가의 길을 거쳐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순교자의 묘소를 찾을 수 있었다.
천주교 신자는 아니어도 동네 주민들이 자주 오르는 산책길이 옆으로 통하여 다행이 외로움을 달래고 있는 형국이었다.
다행인 것은 윤봉문 요셉 순교자 현양 위원회에서 순교자의 묘지를 지세포 성지조성구역으로 이전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안내문이 위안을 삼게 한다
* 찾는 길 : 거제 소방서 맞은 편 골목길을 따라 국사봉쪽으로 올라가면 좌측으로 청솔빌라가, 우측으로 어린이집이 보이는데 청솔빌라 뒤 작은 길로 올라가면 순교자가 잠들고 있다.
(청솔빌라 뒷길)
(십자가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