智士 칼럼(신문)

11월에 편지를 써요

goldenfiber 2010. 11. 23. 17:13

 

11월에 편지를 써요

김철모 /시인


 모처럼 시간을 내어 냅다 도망가는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천천히 가 달라고 사정을 하기 위해 지난 주말 이웃 백양사를 찾았다.

가을산은 벌써 깊은 산중으로 빠져 들어 가 마음먹고 출가한 스님처럼 돌아 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핏빛으로 발하기 위해 그렇게 몸부림치던 나뭇잎들은 하나, 둘만을 남겨둔 채 송두리째 고향으로 돌아가고 나무들은 매서운 찬 바람을 온 몸으로 받으며 꽃 피는 봄날을 생각하며 스스로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어쩌다 미처 길 떠나지 못한 몇 그루 남은 단풍나무에 다녀 간 기록을 남기기 위해 연신 카메라 셧터를 눌러대는 관광객들을 보노라니 늦게 찾은 사람들을 위해 작은 여운조차도 남기지 않은 가을이 무정하게 느껴진다. 화사한 봄날을 생각하고 무더웠던 지난여름을 생각하니 갑자기 옆구리가 시려 옴을 느껴지며 무수히 나딩굴고 있는 낙엽을 밟노라니 발자국 소리에 맞춰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찬바람이 부는 이런 때 누군가는 모르지만 그냥 몇 자 낙서라도 전하면 된다. 다듬어지지 않은 시상이지만 누에에서 실 나오듯 구구절절 시구가 겸비된 편지가 나올 듯 하여 말이다. 모조건 편지를 써 보자. 그간 잊고 지냈던 친구들도 좋고, 초등학교 선생님도 좋다. 아니 군대 간 자식에게도 좋고, 집 떠나 있는 자식들에도 좋고, 수능 끝난 자녀에게도 좋고, 시골에 계신 부모님에게도 좋다. 동네 어귀 보통이에 서 있는 빨간 우체통이 바쁘던 입을 다문 채 할 일을 잃어 버리고 멍하니 서 있는 세상, 집안 애경사에 대한 감사의 뜻도 문자로 날리는 세상, 보턴 하나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좀더 성의를 보인다면 볼펜으로 또박 또박 써 내려간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편지를 보내고, 받아 보는 감회는 아무래도 남다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판을 두드려 만든 올 고른 편지를 사양할 이유는 없다. 오직 정성과 마음이 담겨져 있으면 된다. 따뜻한 마음과 지난날의 감회와 훈훈한 덕담이 가득 이어지면 옆구리 시린 이 시절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처럼 옆구리를 확실하게 매울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육성으로만 전해지던 애비의 정을, 어미의 정을, 친구의 정을, 자식의 정을, 제자의 정을 오랜만에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의 힘을 빌어 편지를 써보자. 잊어버린 편지지의 추억을 더듬어 잊고 지내왔던 사람들과 과거와 현재를 나누어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시대로 돌아 가 편지로 떠나가는 이 가을의 정을 나누어 보자. 

 

2010년 11월 23일 전라일보 15면, '젊은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