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성지와 김 토마스 신부님
한국의 카타콤브라 불리는 박해기의 교우촌, 최초의 조선교구 신학교 마을,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 중심지, 순교자들의 본향이요 영원한 안식처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471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배티성지를 몇자로 적는다면 이렇다.
(감곡 매괴성당에서 이 곳 배티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김웅렬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의 미사 집전)
(자서전 펜 싸인회)
(성당 한 켯, 매괴 성모님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 100년간의 박해,
바로 그 시절 이 곳 '배티' 골짜기와 산너머 이곳저곳에 비밀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837년 5월, 모방(나 베드로)성인 신부님과 샤스탕(정 야고보) 성인 신부님과함게 배티 교우촌에서 3~4일을 유숙하며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고, 이로써 배티 교우촌은 충청도 최초의 공소로 설정되었다
1839년 기해 박해와 병오박해(1846년)을 거쳐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 날까지 교우촌 수는 더욱 늘어나
배티, 삼박골, 은골을 비롯하여 정삼이골, 용진골, 절골, 지구머리, 동골, 지장골등 15곳이나 된다
또한 배티 성지는 다블뤼(안 안토니오) 성인 주교님이 신부였을 때 1850년 교구장 페레올(고 요한) 주교님으로부터
'조선교구 소 신학교' 설립의 명을 받고
이 곳 배티 교우촌 안에 신학교 교사(소성당 겸 사제관 겸용)로 사용할 집을 마련하여 1853년 여름까지 배티에 상주하면서 순방에 나섰고
그 뒤를 이어 최양업 신부님이 배티 신학교를 맡게 된다.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 중심지 배티성지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요, 두번째 사제,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이성례(마리아) 순교자의 장남
1836년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최양업 신부님은 그 곳 신학교에서 사제의꿈을 키워 드디어 1849년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는다
최신부님은 7개월정도 중국에서 사목하다 귀국한 이래 12년동안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등 조선의 복음화에 앞장선다
1853년 여름 배티 조선교구 힌학교의 지도를 맡은 3년동안 배티 교우촌을 존당(사목) 중심지로 삼아 사목과 저술활동을 전개한다
1861년 6월 사목활동의 과로에 장티푸스로 쓰러지고 말았는데 당 40세,
배티와 인근에는 유명, 무명의 순교자들의 묘소가 산재되어 있는데
진천읍 사석리와 옛 성당 터와 은골, 베티 성재골의 6인묘, 배티고개 아래 14인의 묘 등등 배티 인근의 순교자 묘소는 28기에 이르러
순교자들의 본향으로써 영원한 안식처로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진천에서 배티를 거쳐 안성시로 빠지는 작은 지방도가 개설되어
이 곳 배티 성지를 찾는 수많은 신자들에게 교툥 편의를 제공하고 있지만
길이 뚫어지기 전 이 곳은 하느님이 주신 천혜의 박해기의 교우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전 정보도 없이 배티성지를 찾았을 때 하느님께서 주신 또 하나의 선물은
예비신자로서 감곡성당을 방문 했을 때 마음으로부터 감명 깊은 믿음을 안겨 준
김웅렬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이 이 곳 배티 성지를 지키고 있어
주님께 또 한번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더구나 라틴어 미사를 거행하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배티성지에서는 김웅렬 신부님의 집전 아래 두달에 한번(작수 달) 첫번째 주 토요일 오후 2시 30분에 라틴어 미사를 봉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