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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유적지-남양주시

goldenfiber 2012. 6. 28. 23:06

 

 

다산의 생가 - 여유당

다산 생가 안채

 

 

 

다산 정약용은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으며 1762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일명 양근 마재, 현재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정재원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천주교 탄압의 바람이 일자

전남 강진에서 유배 18년을 보내면서 목민심서 등 수많은 명저를 남겼다 

성호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을 집대성한 당대의 최고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다산(1762-1836)은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났다. 한국의 역사와 지리뿐만 아니라 서양의 과학지식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墭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수원성 축조에 기여하였으며,

정계에 입문하여 세 번의 유배와 해제를 반복하다가 강진에서 18년간  마지막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10여 년 간 머물면서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으며

또한 후진양성에서 힘을 기울였다

 

다산 정약용은 당대 실학자이면서도 천주교 집안이라는 것 때문에 당시 정부로부터 엄청난 피박과 처벌을 받았다

신앙생활를 하던 약용은 신해박해(1791년)때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으나 을묘년의 포도청 장살사건이 당쟁으로 번지면서

반대파의 원성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잠시 천주교를 떠났다가.

이어 신유박해(1801년) 때 배교함으로써 죽음을 면하고 포항 장기로, 다시 황사영백서사건이 터지자

전남강진으로 유배를 떠나 18년간의 유배 생활동안 실학을 집대성한 5백여권의 주옥같은 저서를 집필하였고,

그러나 이 때 그는 스스로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불러 초대 교회 창립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크게 활약한 형 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서소문밖에서 순교한데 대해 부끄러움을 표시하였다.

 

그는 당시 참담한 심정을 ‘만천유고(蔓川遺稿)’에서 ‘한평생 살다보니 어쩌다가 죄수가 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을까,

그 옛날 어질던 스승과 선배 그리고 절친했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나’라고 노래하였다.

또한 유배에서 풀려 난 지 고향으로 돌아와 2~3년 뒤로 그의 생활은 은둔과 묵상, 고행과 기도로 일관했을 뿐만 아니라

회갑을 맞으면서 미리 작성해 둔 자신의 묘비명 가운데 참회와 성찰의 문구가 역력히 들어 있다.

다산은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면서 형 약전을 많이 그리워 했다.

 

특히 다산 정약용의 유적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 75-1번지 위치한

다산이 태어난 이 곳에 마련되어 있으며

부인과 합장된 묘소와 함께 여유당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다산을 기리는 사당과 기념관, 문학관과 실학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

다산의 흔적은 유배였던 전남 강진 다산초당과 기념관이 있으며

다산의 고향인 이 곳 능내리에 위치한 다산유적지에서 다시 느낄 수 있다.

 

 

정약용(丁若鏞, 1762년 음력 6월 16일, 경기도 광주 ~ 1836년 음력 2월 22일)은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며, 실학자· 저술가· 시인·철학자· 과학자· 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는 미용(美庸), 는 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중농주의 실학자전제 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

문집으로 유배 생활 중 대부분이 저술된 《여유당전서》가 있다.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 정조의 다른 최측근인 홍국영과 인척관계이기도 하다

 

1762년 음력 6월 16일경기도 남양주시 마재에서 태어난 후 진주 목사를 지낸 부친 정재원(丁載遠)에게서 학업하였다.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인 고산 윤선도의 오대손녀인 해남 윤씨와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으니 약용은 넷째 아들이다.

일곱 살 때에 '산'이라는 시를 지은 것이 남아있는데,

열 살 이전의 어린 시절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이라는 책을 내었다.

 

9세 때 모친상을 당해 맏형수 경주 이씨와 서모 김씨의 손에서 자랐다. 어릴 적에 천연두에 걸렸으나,

왕족 출신의 명의 이헌길의 진료로 살았다.

정약용은 훗날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바탕으로 한층 발전된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을 집필하고,

이것은 현대 의학이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조선의 생명들을 구한다.

또한 정약용은 이헌길의 생애를 다룬 〈몽수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1776년에 승지 홍화보의 딸 풍산 홍씨와 혼인하여 6남 3녀를 낳았으나 생전에 4남 2녀를 잃었다.

누님의 남편으로 여섯 살 위인 이승훈, 큰형의 처남이며 여덟 살 위인 이벽과 친하게 지내면서

학문으로 명성이 높은 이가환과 매부 이승훈을 만났다.

이승훈은 조선에서 최초로 천주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었으며,

성호 이익(1629~1690)의 종손으로 당시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는 중심 인물이었다.

이들에게서 성호의 학문을 접하면서 실학 사상의 토대를 다졌다.

 

<출처 - 워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