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금광리 공소

goldenfiber 2012. 7. 19. 22:10

 

 

  

 

 

 

 

 

 

 

금광리 공소는

1887년에 개설되어 영동 지역의 천주교 모태로서 그 동안 국내의 역사적인 소용돌이 속에서도 잡초처럼 신앙의 씨앗이 싹튼 곳이다.

 
강원도 영동 지역에 천주교가 적극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계기는 고종 3년(1866년) 대원군에 의해서 일어난 병인박해라고 할 수 있다.

강릉 지방에 천주교 공소가 만들어 지는 시기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구한말 19세기 말경에 구정면 금광리와 내곡동 등지에

천주교인들이 이주하여 옹기 굽는 일이나 농사를 지으면서 은밀하게 전교를 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존하고 있는 금광리 공소 현판에 '1887년 창립'이라고 적혀 있는 것과 부합된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여 보면 교우들이 강릉에 이주한 것은 이보다 훨씬 이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소 초기에는 원산의 백응만 신부가 배를 타고 와서 전교하였다고 하며,

그 후 안변과 원산 본당의 주 신부, 표 신부도 배를 타고 와서 전교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강릉 노암동 성당에 속한 공소이다. 

현재의 공소는 약 50년 전 본래 있던 공소터에서 길가 쪽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예전에는 금광리 공소였으며 표지판도 그렇게 되어 있으나 현재 지명은 어단리이기 때문에 어단리 공소라고도 한다.

공소 바로 옆에 김중철(필립보) 공소회장의 집이 있다.

 
영동 지역의 최초의 공소는 원산교구 소속인 구정면 금광리 공소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뮈텔주교일기"를 자세히 분석한

최근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현재 없어진 강릉시 구정면 금광리 삼정평 공소로 하여야 한다는 설이 있다.

 
원산본당에 소속되었던 영동 지방에 1921년 가을 판공 때 금광리 신자들은 최문식 양양 본당 주임신부에게

보좌신부인 이철연 신부를 금광리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실제로 강릉 이남의 공소들은 신자수도 많았으며, 상도문(양양) 본당과의 거리도 멀었다.

이에 최 신부는 보좌 이철연 신부를 그해 12월에 그곳으로 보내 금광리 본당(주문진 본당의 전신)을 설립하였다.

이처럼 영동 지역에는 1921년에 두 개의 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곳 신자들이 열심이기는 하나 거주하기에 적당하지 않은데다가 발전 가능성도 적었으므로

당시 경성교구 부주교이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유(Devred) 주교의 지시로 1923년 주문진에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1923년 11월 23일 금광리를 떠나 주문진(당시 신리면 橋項里 133)으로 이전하였으며,

 이때부터 주문진 본당이란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Goodnews)

 

필자가 찾은 금광리 공소는 이제 시골 빈집처럼 건물만 덩그러이 있을 뿐 이 곳이 영동지역의 신앙의 모태라고 하기에는

모두가 빈약한 상태였다

마침 방문 했을 때 외로운 성모님 곁에 길고양이 한마리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믿음의 기록으로 매우 의미가 있는 이 곳을

우리 스스로 너무 내박쳐 놓은 것은 아닌지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특히 이곳 구정면은 충청, 전라, 경기, 경상도 등에서 당시 정부의 박해를 피해 산간지대로 피신해 오는 요충지로써

영동지역에 믿음의 씨를 뿌린 곳이건만 현재는 모두 도시부로 떠나 그 유족에 대한 보존대책이 시급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