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모 형의 세번째 시집 상재에 부쳐- 시평
<김철모 형의 세 번째 시집 상재에 부쳐>
이천십이년 십일월 십일일.
곧게 뻗은 아라비아 숫자 네 개가 겹치는 날.
아이들은 ‘빼빼로 데이’라며 서로에게 초콜릿 막대과자를 선물하느라 법석이다.
대형 할인매장에서 상자를 통째로 구입해가는 부모들이 적어진 것을 보면 그나마도 요즘은 시들해진 모양이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같은 날 좀더 의미가 있는 기념일이 있다. ‘농민의 날’이다.
한자로 ‘십일十一’을 세로로 쓰면 흙토土자가 만들어 진다. 십일월 십일일은 그래서 흙이 두 개가 나오는 날이란다. 흙에서 나와 흙에서 살다 흙으로 돌아가는 농민들을 생각해 그날은 오전 열한시에 행사를 한단다. 비로소 흙이 세 개가 생기는 때에 말이다.
올해의 십일월 십일일은 나에게 좀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전북도청에서 예산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김철모 형이 바쁜 시간을 쪼개어 엮어낸 세 번째 시집 <봄은 남쪽 바다에서 온다>를 펴낸 날이기 때문이다.
철모 형은 매사에 철두철미한 사람이다.
가정에서는 부인과 두 아들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남편이자 아버지로 빈틈이 없다.
밖에서는 어느 누구 하나 허투루 상대하지 않는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는 사람이고,
일에 있어서나 말을 할 때도 꼼꼼하기 이를 데가 없어 그야말로 방정方正한 분이다.
철모 형과의 인연은 2004년쯤으로 기억되니 올해로 9년째가 된다.
그 사이 형은 두 권의 시집을 펴냈고, 나는 매번 보내 온 시집을 읽고선 아무런 촌평도 하지 않았었다. 참으로 송구한 일이다.
이번에 세 번째 시집을 보내 왔을 때, 책을 열어보면서 이번에는 꼭 감사의 인사를 드리리라 다짐했었다.
육하원칙의 문장에 익숙한 기자출신이 서정과 서사성이 담긴 언어를 조율하고 조합한 시에 대해 평을 한다는 것은 억지다.
더구나 오랜 시간 절차탁마切磋琢磨해 온 형의 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덧말을 붙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히려 기자출신의 메마른 감성이 형의 시를 객관적으로 볼 수도 있겠다는 위안으로 감히 형의 시에 얄팍한 평을 덧대본다.
‘봄은 남쪽바다에서 온다.’
왜 하필 이 시 제목이 표제가 되었을까.
시인이 다루는 시재詩材는 가족과 고향, 자연과 주변의 일상이다.
그저 소소하다. 오지랖이 넓지 않는 것이 그의 시가 갖는 매력이다.
오히려 시인은 오지랖을 꼭 여미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일에 치중한다.
믿는다는 것
어렵고도 쉬운 일
믿음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고
믿음이 있으면 쉬운 일이지
(중략)
이제라도 내 믿음으로 믿어지기를
믿는 다는 것이
-<믿는 다는 것>중
시인은 믿음을 ‘내 믿음으로 믿어지기를’ 소원하고 있다.
타자로 향하지 않고 대자적인 소원으로 치환하여 내면의 오지랖을 여미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겸손함이 갖추어진 다음에야 이를 수 있는 경지다. 상대에 대한 믿음이든 절대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든 모든 믿음은 나를 낮추는 것에서 비롯된다.
절창切創은 관념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사색하고 고뇌하는 사이에 자라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 믿음으로 믿어지기를’ 소원하는 부분은 그의 고뇌와 사색과 절망스러웠던 ‘믿어지지 못함’을 딛고 끝내 망울을 터뜨린 절창이다.
한편 시인의 시선은 크고 우람하고 거대한 것보다 작고 보잘 것 없고 지나치기 쉬운 것들에 쏠린다.
<금요일의 봄비>는 봄비라고 하기에는 아직 이른 2월의 두 번째 금요일 새벽에 내리는 비를 그리고 있다.
오래 소식이 없어 애를 태우던 여러 마음을 대신해 시인은 비에게 조심스러운 책망을 하면서도 반가움을 전하고 있다.
지나치기 쉬웠을 바람소리마저 시 안에 붙잡아 두기 위해 ‘혼자오기 미안해 데려온 친구’로 멋지게 표현해 내는 시인의 사유가 한 없이 부럽다.
그런가 하면 4월이 되자 때 이른 여름 날씨로 괜한 봄꽃들이 ‘얻어 들었’다며 카메라로 ‘해 풀이’하는 풍경을 재미있게 잡아냈다.
어찌 풀꽃인들 제 마음대로 피었다 질 수 있겠는가. 오직 자연의 섭리를 따른 것뿐인데도 사람들은 괜한 봄꽃에 화풀이를 하는 모습에서 읽는 동안 살짝 웃음이 번진다.
<변산 마실길>에 나선 시인은 ‘갯바위의 미소’와 ‘솔바람 소리를 동무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간다.
바쁠 것 없는 걸음이니 ‘싸드락 싸드락’ 바다와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는 시인의 고즈넉한 여행이 눈에 잡힐 듯 하다.
정직한 시인이 가끔은 거짓말로 독자에게 귀여운 농담을 건네는 대목도 보인다.
변산 마실길에 가면
솔섬의 낙조에 풍덩 빠질 수도
갯바위 낚시에 인어공주를 낚을 수도
곰소 젓갈에 밥 한 그릇 게 눈 감출 수도
줄포 갈대숲에서 애인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변산 마실 길에 가면>중
이처럼 황당하고 끔찍한 경고가 있을 수 있나.
그러나 변산 마실길에 다녀와 본 사람은 시인의 거짓말에 금방 공감한다.
갯바위에 앉아 있노라면 인어공주가 가끔 말을 걸어오고, 줄포 갈대숲에서는 애인뿐만 아니라 나 자신마저 잃어버릴 수 있으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시인은 거짓이되 거짓이지 않은 말로 독자들에게 귀여운 농담을 건넬 줄 아는 사람이다.
시인은 맨 처음 상재上梓한 시집에서 자신의 고향인 ‘지사리’를 전면에 내세웠다.
지금은 양친 모두 떠나신 쓸쓸한 고향마을이지만 시인의 마음 한 켠에는 여전히 막내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 계시는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
그래서 고향을 다시 찾은 시인은 서당봉 자락을 걸어 띠밭을 지나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
철쭉만 남아 있는 산소를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엔 막내아들을 기다리다 쑥 패인 눈자위를 한 어머니가 그려진다.
누구나 어머니를 생각하면 애잔함이 일겠지만 시인의 눈을 통해 뵙는 어머니는, 아들들 서울로 보내고 베갯잇 적시는 아내를 통해 다시금 되살아난다.
경인년 설 연휴 마지막날
(중략)
둘째 떠나보내고 돌아 선
아내의 한 번 터진 눈물샘은
(중략)
마른 논 서마지기
해갈하고도 넘쳐난다
(중략)
그 놈의 샘은 가뭄도 없는가 보다
-<두 영감 할멈2>중
어쩌면 시인은 아내를 통해 어머니를 만나고, 어머니를 통해 아내를 보는 것일 수도 있겠다. 같은 시의 도입부에서 시인은 ‘명절의 끝자락/어머니 눈가에/늘 맑은 눈물이 맺혔다’라고 시작하며 이미 어머니와 아내를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보내야 했던 어머니의 눈가에나 자식을 보내는 또 다른 어머니인, 아내의 눈가에는 항상 그렇게 눈물이 맺혀 있었던 것이다.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을 감상하면서 어수룩한 독자의 마음을 울린 시 하나를 꼽으라면 <김약국 벽시계>를 들고 싶다.
늙음을 향해 달려가는 나 자신과 약국의 하얀 벽면에서 쉼 없이 고개를 넘어야 하는 시계의 운명 속에서 서로의 측은지심을 읽었다고나 할까.
또 다시 닥쳐올 황혼을 걱정하며
하루에도 천사백 사십 번의
숨 가쁜 고비를 넘겨야 한다.
-<김약국 벽시계>중
시인의 관찰처럼 어쩌면 ‘이 병은 김약사가 고칠 수 없는 병’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앞에 닥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고, 다시 돌아올망정 시계는 숨 가쁜 고비를 계속 넘어야 하는 운명이다.
그나마 김약국의 벽시계는 바로 곁에 김약사가 지켜주니 걱정 없고, 나 또한 힘들 때 위안이 되어주는 시인을 만날 수 있으니 감사할 일인가보다.
여리고 섬세하고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아는 시인은 그래서 ‘봄은 남쪽바다에서 온다’고 한다.
봄은 나뭇가지 끝에서도 개울물 소리에서도 마당을 뛰어다니는 강아지에게서도 올 수 있는 것이다.
봄이 남쪽에서 오는 것이야 두말할 것 없이 당연한데도 그가 굳이 남쪽바다에서 온다고 한 이유는 시인의 내면에 움직일 수 없는 진심, 어머니를 향하고 가족을 향하고 고향을 향하는 시인의 항심恒心이 도저到底하게 자리 잡고 있기에 그렇다.
에둘러 시인이 ‘봄은 처녀의 옷자락에서 온다네.’ 라고 노래를 했으면 이미 그것은 김철모 시인의 시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독자인 나는 ‘봄은 남쪽바다에서 온다’는 그 말을 믿고 다가오는 봄, 남쪽바다로 나가 보련다.
어쩌면 젖멍울 진 채 얼굴 붉히는 한산도 동백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2012.11.28일 철모형의 시집을 소중하게 감상한 대홍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