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고도(古都), 익산

goldenfiber 2013. 4. 21. 22:16

 

익산 왕궁면 소재 백제 왕궁터, 왕궁터  발굴을 시작되면서 출토물 여러가지가 이 곳이 백제의 무왕때 궁터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여기가 수도였음을 나타내는 기와 와편, 지금부터 1,600년 전의 일이다 

 

 

익산 왕궁리유적(사적 제 408, 1998. 9. 11 지정)은  유적지 내에 국보 제 289호 익산 왕궁리 5층석탑이 있고, 인근지역에 동쪽으로 익산 제석사지 2,

북서쪽으로 익산 미륵사지가 약 4.8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 30대 무왕(武王 : A.D.600 ~ 641)대에 왕궁으로 건립되어 그 후 사찰로 변화된 것으로 보이며,

1965년에는 북쪽으로 기울어있던 석탑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한 해체보수를 하던 중 석탑의 1층 옥개받침과 기단부에서 금제금강경판을 비롯한 사리병, 불상, , 방울 등의 일괄유물이 발견되어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백제 왕궁터에 대한 부분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왕궁 담장의 외곽경계와 석탑의 북측에서 금당건물터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이 유적은 백제 무왕이 천도한 왕궁으로 주목받게 되었고 일부에서는 별궁이나 미완의 왕궁설 등을 제기되었고 석탑과 관련된 사찰은 왕궁 내 내불당적인 성격의 사찰로 인식하게 되었다.

 

1989년부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시작하여 현재까지 20년 동안 진행되고 있으며 왕궁의 정확한 규모와 형태, 궁내부의 건물지,

백제 최고의 정원 유적, 석축, 금을 가공하던 공방터, 백제시대의 화장실, 탑과 관련된 사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백제 왕궁의 모습이 하나 둘씩 점점 더

구체화 되어가고 있다.

 

익산 미륵사지, 경주의 황룡사와 동일 규모의 대 가람으로 알려 져 있다. 3탑 3금당 형식으로 좌우는 석탑으로 정중앙은 목탑 형태를 하고 있다.

 

2009년 1월  미륵사지 서탑해체 과정에서 나온 국보급 금동제사리장엄와 금제사리 봉안기

이로서 여기 미륵사지가 백제 무왕과 무관치 않음이 밝혀졌다

 

 

익산 미륵사지 금동향로는 8세기초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다르 ㄴ지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동물얼굴 모형의 다리4개가 받히고 있는 향로로 

보물제1753호로 지정되었다

3문 3탑 3금당, 서탑과 동탑은 석탑이고 중앙의 중원은 목탑으로 이뤄졌음이 밝혀졌다

최근 동탑은 복원이 되었으며. 서탑은 현재 해체하여 복원 준비를 하고 있다

 

서탑해체후  기초부분, 해체과정에서 금제사리장엄이 출토되었다. 

서탑지에서 바라 본 구름으로 드리워진 미륵산, 8부능선쯤 사자암지가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미륵사는 백제 제30대 무왕(재위 : 600-641)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미륵사터를 발굴조사하여 출토유물들을 살펴 본 결과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미륵사는 석가모니불이 아닌 미륵불을 모셨던 절로 추정되며, 33금당이 나란히 있는 가람의 형태에서 중원의 목탑과 금당의 규모는 좌우 가람의 2배가 되는데,

좌우 가람의 석탑은 석탑으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것이다

무왕이 이러한 미륵사를 당시의 수도인 부여에 짓지 않고 여기에 지은 것은 무왕이 수도를 부여에서 이곳 금마로 옮기려고 했다는 사실과 함께 정치, 경제, 군사, 종교적인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현재의 서탑은 1915년에 일본인에 의해서 수리되었고 동탑은 1992년에 문화재관리국과 전라북도에 의해 복원된 것이며, 서탑은 현재 헤체하여 복원을 준비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