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재성지
묘재성지 - 좌측 옛 공소건물과 우측 남종삼 성인의 유택
옛 공소 건물
남종삼 성인 유택
흉상과 유적지 표석
남성인의 부친 남상교 와 남성인 묘지석 탁본
문살모양이 비친 남종삼 성인 초상화
용소막 성당 학산 공소
충북 제천시에서 강원도 원주로 오르는 길, 병인년 서소문 밖에서 치명한 성 남종삼(南鐘三, 1817-1866년)이 살던 묘재가 있다.
남종삼 성인은 충주에서 태어 났으며 103위 한국 성인 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으로, 원래 생부는 남탄교(南坦敎)이나 장성한 뒤 슬하에 아들이 없던 백부 남상교(아우구스티노)의 양자로 들어갔다. 남상교(南尙敎, 1784-1866년) 는 정약용의 학통을 이은 농학자(農學者)로 충주 목사와 돈녕부(敦寧府) 동지사(同知事)를 지냈다. 남종삼의 학문과 사상 형성, 그리고 훗날 천주교에 입교한 데에는 부친의 영향을 컸다.
기록에 나타나는 남종삼 성인의 최초의 교회 활동은 1861년에 입국한 리델(Ridel) 신부에게 조선말을 가르친 것이나, 이전부터 이미 베르뇌(Berneux) · 다블뤼(Daveluy) 주교 등과 교류하면서 교회 일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의 입교 후 가족들도 모두 천주교를 신봉하는데 아버지 남상교는 신앙에만 더욱 전념하고자 묘재로 이사해 은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바로 이곳에서 1866년 병인박해 때 공주로 유배되어 순교할 때까지 아들 남종삼이 찾아오면 가르침을 베풀며 신앙과 조국애를 일깨워 주었다.
높은 학문을 성취한 남종삼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해 영원현감, 영해부사 등 지방 장관을 거쳐 철종 때에는 승지 벼슬에 오르고 고종 초에는 왕족의 자제를 가르치기에 이른다.
그러나 향교 제사 문제로 신앙과 관직의 두 가지 중에서 당연하게도 관리직을 내놓았다. 남씨 부자의 묘재 정착은 평소에 상종하던 이들과의 생활 풍습이 신앙 계명을 지키는 데 어려움을 초래했기 때문으로, 남씨 부자에게는 높은 벼슬, 명예와 권세, 안락한 생활 등 양반으로 누릴 수 있는 영화와 특권을 스스로 끊어 버린 일대 결단이었다.
1863년 말경, 대원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남종삼은 좌승지로 발탁되어 다시 임금 앞에서 경서를 논했다. 그 때에 두만강을 사이에 둔 러시아가 수시로 우리나라를 침범하면서 통상을 요구했다. 조야는 어찌할 줄 모르던 차에 남종삼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我策)’이라 하여 국내의 프랑스 주교를 통해 한불 수교를 맺고 서양의 세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물리칠 것을 건의했다.
대원군은 그의 건의를 쾌히 받아들였으나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부주교가 모두 황해도와 충청도에서 전교 여행 중이어서 약속 시간 내에 찾아내지 못했고 평안도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장 주교는 급히 서울로 올라왔으나, 그때는 이미 러시아인들이 물러간 후였으므로 러시아의 침략 위험은 저절로 사라진 때였다 이미 때는 늦어 대원군은 정권 유지의 간계로 천주교 박해를 결심했던 터였다.
남 승지는 일이 그르친 것을 깨닫고 묘재로 내려가 부친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남상교는 그의 말을 듣고 "너는 천주교를 위해 충(忠)을 다하였으나 그로 말미암아 너의 신명(身命)을 잃게 되었으니 앞으로 악형을 당하더라도 성교(聖敎)를 욕되게 하는 언동을 삼가라."고 가르쳤다.
부친의 준엄한 가르침을 받은 남 승지는 치명을 각오하고 배론 신학당을 찾아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한양으로 향했다. 이미 한양으로부터 체포령이 떨어져 있던 그는 결국 한양을 채 못 들어와 고양(高陽) 땅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 홍봉주, 이선이, 최형, 정의배, 전장운, 그리고 베르뇌, 다블뤼 주교와 함께 병인년(1866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되었으니 당시 나이 50세였다.
이후 남종삼의 시신은 홍봉주의 시신과 함께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유해가 발굴되어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고, 시복을 계기로 1967년 10월 다시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이때 성인의 유해 일부를 가족 묘소인 장흥면 울대리에 모셔 안장하였다.
한편 남종삼이 순교한 후 그의 가족들도 모두 체포되었는데, 부친 남상교는 붙잡혀 공주로, 장자 남규희(南揆熙)는 전주로 유배되어 순교하고, 처 이소사와 차남 남명희와 두 딸은 경상도 창녕으로 유배되어 노비생활을 하게 된다. 그 후 이소사도 창녕에서 순교하니 3대에 걸쳐 4명이 순교한 셈이다. 남종삼 요한은 1968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시복되고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순교자 남상교와 성 남종삼의 유택이 있는 마을에는 1920년대부터 신자들이 들어와 교우촌을 이루었고, 1938년에 목조건물의 공소를 신축하였다. 유택 앞에 있는 옛 공소 건물은 1955년 9월 신축하였고,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학산 공소는 1989년에 신축하였다. 또한 순교자의 후손과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1987년 유택을 보수하였고, 뒷산에 14처를 조성하였으며, 1999년 5월 6일 유택 뒤편에 성모상을 세우고 축복식을 가졌다.
묘재에서 산 하나를 넘어서면 한국의 카타콤바라 할 만한 배론 성지가 위치하고 있다 이 곳 학산에는 많지 않은 가구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있고 마을 속에 성지가 위치하여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냘 지날 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유택과 유택 앞 옛 공소건물이 사람들이 찾지 않아 일부 벽이 떨어져 나가는 등 명성있는 성지로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