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위 복자품, 정찬문 안토니오 성지
124위 복자품에 오른 정찬문 안토니오 성지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의 중촌 마을에는 머리가 없는 유해가 묻혀 있다 해서 ‘무두묘’(無頭墓)라 불리던 순교자 정찬문(鄭燦文, 1822-1867년) 안토니오의 묘가 있다.
정찬문의 묘에서 내려다보면 중촌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와 그 옛날 순교로 신앙을 증거한 그가 지금도 마을 사람들을 향해 굳은 믿음을 당부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묘가 서 있는 허유 고개는 신자들이 수시로 넘나들었던 고개로 사봉 공소 곁에 자리잡고 있다.
정찬문은 1822년 10월 13일(음) 진양 정(鄭)씨 양반 가문의 부친 정서곤(鄭瑞坤)과 모친 울산 김씨 사이의 외아들로 진주 동면 허유 고개 중촌에서 태어났다. 진양 정씨 가문은 일찍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는 지조로 낙향한 고려 말 대사헌 정온(鄭溫)의 후예로 정찬문 역시 선대의 이러한 가풍을 이어받아 강한 절개와 지조 있는 인품을 지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대산 가등 공소의 천주교 신자 집안의 여자인 칠원 윤씨와 1841년 이전에 혼인하여 아들 중순을 두었다. 그는 부인의 권면으로 1863년, 그의 나이 41세에 입교하여 단란한 성가정을 이루며 전교 활동에 충실한 생활을 했다. 특히 이들 부부가 전교 활동을 했던 시기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던 과도기적 시기였기에 비교적 박해의 위협을 받지 않고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진주로 끌려간 정찬문은 25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종종 관장 앞에 끌려 나가 온갖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배교를 입에 담지 않고 굳건히 신앙을 고백했다. 그 동안 그의 가산은 적몰되고 가족들은 생활이 어렵게 되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아기를 등에 업고 밥을 빌어 옥으로 나르던 부인 윤씨의 격려에 힘입어 그는 끝까지 굴하지 않고 순교의 월계관을 쓸 수 있었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과 무수한 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모진 매를 맞고 감옥으로 끌려들어간 그날 밤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1867년 1월 25일(음력 1866년 12월 20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정찬문이 장사(杖死)로 순교한 진주 감옥은 진주 공설시장 인근 중앙시장과 옥봉동 성당 사이에 있었으며, 윤봉문 요셉 역시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1946년 문산 성당의 서정도 베르나르도(1899-1964년) 신부는 굼실(隅谷, 사봉면 사곡리) 공소 회장에게서 무두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1948년 3월 무촌리에 살고 있던 광산 김씨 할머니(당시 94세)의 제보를 받아 허유 고개 길섶에 초라한 모습으로 있던 순교자의 묘를 찾았다.
그 해 5월 31일 교우들과 순교자의 외인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해를 발굴해 새로 입관한 후 약간 위쪽으로 이장하고 그 앞에 본당에서 준비한 기념비를 세웠다. 그 후 1975년 10월 중순 그 인근에 새로 조성된 사봉 공소의 순교자 묘역(사봉면 무촌리 중촌 마을)으로 이장했고, 1978년 1월 28일 묘소를 새로 단장하면서 그 옆에 순교비를 건립하였다.
정찬문 순교자의 묘소를 보존해 온 문산 성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2005년 4월 3일 순교자 묘소가 조성되어 있는 사봉 공소에 새 공소 건물을 신축해 축복식을 가졌다. 아직 성지로써 제대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아쉬움이 있는 곳이지만 그 순교정신은 살아 있고 묵묵히 예수님은 성지를 지키고 있었다.
다행히 그의 순교는 헛되지 않아 금년 8월에 있을 하느님의 종 124위에 이름을 올려 금년 8월 시복식을 갖게된 것은 믿음하나로 살아온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선물이 되리라 생각된다.
앞으로 할 일은 이 곳 성지의 알맹이를 채워 넣는 일이고 가능하면 숭고한 순교를 이겨내는데 힘이 된 부인 윤씨의 행적도 찾아서 그 순결한 정신과 넋을 위로하는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 고복(考覆) 죽을 죄를 지은 죄인의 재판 서류를 재심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