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성웅 이순신에 무게감 있는 최민식, 조선 지배의 야욕에 가득 한 왜군 수장 '도도'에 김명곤, 이순신에게 뼈 아픈 패배를 당한 왜군 장수 '와키자카'에 조진웅,
냉혹한 지략을 갖춘 왜군 용병 '구루지마'에 류승룡이 등장하는 '명량'
누명을 쓰고 파면을 당했던 이순신의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 임명되면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고민하는 잔잔한 전반부에 이어
사기충천한 구루지마부대를 앞세운 일본 수군의 전라도 점령작전이 시작되면서 후반부의 긴장감과 박진감의 전투신이 시작된다.
수적으로 열세이자 전의를 상실한 병사와 장수들, 악랄한 일본 수군들의 만행에 두려움에 가득 찬 백성들을 어떻게 용기를 불어 넣을 것인가가 이순신의 과제
더구나 차라리 남해를 내주고 육지로 도망가자는 일부 장수들의 행동으로 어렵게 복구한 거북선마져 불타자 이순신은 고민에 빠진다
결국 지형지물을 이용한 해상작전을 세울 수 밖에 없는 이순신은 지금의 진도와 육지사이인 율돌목을 그 전장으로 쓰기로 한다
불과 12척의 배로 330척의 애군의 배를 맞아 명량 바다를 지켜야하는 운명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쫓아야 하고 그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국가는 백성이 있어야 하고 국가는 곧 왕이 존배하는 것'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 용기는 승리로 나타 날 것이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이순신으 작전은 단 세가지
일자 형태로 12척의 배를 나란히 배치하는 일자진(一字陣), 하지만 이순신이 승선한 대장선만 나설뿐이다
좁은 길목을 이용한 백병전(白兵戰), 무기와 숫적으로 열세한 이순신은 백병전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머리로 받아버리는 충파(衝破)로 승기를 잡는다.
명량대첩은
1597년 임진왜란 6년, 이순신 장군이 단 12척의 배를 이끌고 330척의 왜군을 무찌른 전투로 일본에게 해상권을 빼앗긴 후 한양 함락의 위기에 몰렸던 조선의 역사를 바꾼으로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영화 '명량'이 극장가를 단기에 휩쓰는 것은
최민식 등 호화 배역진도 배역진이지만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정치권에 대한 식상함과 세월호참사에 대한 남의 탓만 하고 있는 정부와 정치권들
요즘 병영내 신병들의 사건사고와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이를 덥기에만 급급한 군 수뇌부에 대한 반감 등
애국심 없는 오늘 날 우리들의 모습이 모두 투영된 결과가 대 성공을 가져 온 곳 아닌가 생각한다.
성웅 이순신은 자신의 전서에서 유명한 말을 남긴다
약무호남(若無湖南)이면 시무국가(是無國家)라. 즉 만약 호남이 없었더라면 나라도 없다는 말이다
호남은 참으로 중요한 위치이자 고장이었다
명량전투에서 보듯 여기에서 왜군의 수군을 차단하지 못하면 호남은 물론이요 나라 전체가 위급하기 때문이다
호남이 중요한 이유는
첫째, 호남지방은 국가의 군량미를 충당하는 보고 였다
둘째, 호남지방은 예전부터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분연히 의병이 가장 많았던 곳이다
셋째, 전라죄수사 소속은 수군들은 지형적 특성상 당시 호남사람들이 주종을 이뤘던 것이로 보인다.
이순신장군의 성공은 일찍히 정읍 현감과 전라좌수사를 역임하면서 호남의 특성과 지형지물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좀 늦은 나이인
32세인 1576년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늦깍이 45세인 1589년 초대 정읍현감에 부임하고
47세인 1591년 2월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발령난다
48세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5월에 옥포해전, 사천포해전 7월에 한산도 대첩, 9월에 부산포 해전을 승리로 이끌지만
당시 조정은 당파 싸움으로 내분이 심했고 그 와중에 누명을 쓰고 관직을 박탈 당한다
그리고 당시 나이로는 좀 많은 53세인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여
그 해 9월 명량해대첩의 승리를 거두고 11월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까지 오직 나라만을 생각하는 충신이었다.
이순신은 수많은 고난속에서도 오직 나라만을 사랑하는 애국심, 충성밖에 없었다.
다만, 그 웅장한 전투신에 반해 전반부의 너무 잔잔함 지속과 모든 수군을 호령하는 장군의 기계는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