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의 재조명(200701 서남저널
고부(古阜)의 재조명
김 철 모(시인, 전 익산부시장)
고부(古阜)하면 사람들은 갑오동학농민혁명을 떠 올린다. 그만큼 고부는 동학농민혁명과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어서이다. 더구나 지금은 행정구역이 변천되어 한 시골 면으로 쇠락하였지만 과거 고부는 지금의 정읍시와 고창일부, 부안일부를 관할하는 지역으로 행정중심지였으면 교통 요충지이자 물산이 풍부하고 물물거래가 활발했던 곳이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의 태동부터 혁명이 전개되었던 곳곳들 대부분이 당시 고부군 관할이었기에 고부하면 동학농민혁명 단어와 나란히 보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고부 역사는 본디 마한시대에는 고비리국(古卑離國)이었고 백제시대에는 전국을 5방으로 나누고 동,서,남,북 그리고 중방을 두고 각방에는 방성을 두어 방의 중심지로 삼았는데 고부가 그 중방성이었던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이 있었다. 통일시대 757년(경덕왕16) 고부명칭이 사용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936년(태조19) 영주관찰사가 있었고, 951년(광종2년) 안남도호부를 고부에 두었다. 또한 1019년(현종10년) 고부군의 치소를 고부 성황산에 두고 대산, 보안, 부령, 정읍, 인의, 상질, 고창을 영현으로 하였다. 그리고 한참 후인 조선시대 1765년(영조41) 고부군 치소를 고부초등학교 자리로 옮겼으며 비운의 1984년에 고부에서 동학농민혁명이 봉기되었다. 그후 1895년에 전주부 고부군으로 바뀌었다가 1896년 전라북도 고부군으로, 1914년 일제 강점기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군에서 고부면으로 격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으로 우여곡절의 역사를 살라 온 고부이다.
그러면 고부처럼 지역 내에서 역사의 길목에 행정의 중심지로, 교통거점으로, 주민 삶의 현장으로 존재 한 곳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런 면에서 오늘날 고부를 다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첫째는 고부의 역사를 재정리하고 사라지기 전에 현재 남겨진 역사유적과 유물을 발굴하고 보존할 필요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고사부리성의 조기 복원과 함께 고부관아의 재현이다. 현재 고부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지만 지역 내 논의를 통해서 동학농민혁명의 대표적 산물인 고부관아의 재현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 본다. 또한 안남도호부의 유적 발굴이 시급하고, 조선시대 유적과 곡창지역이었던 고부의 근대 수탈역사의 흔적들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고부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 봐 왔을 두승산 명품화 사업이다. 현존하는 등산로와 사찰 간 이어지는 소로 길 정비는 물론이고 호남의 삼신산으로써 위상을 강화하기 위한 유선사까지 단풍길 조성, 전망대 설치 등을 통해 또 다른 정읍시 명소로 가꾸어야 한다. 여기에 석우제 둘레 길을 조성하여 연계함으로써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세 번째, 동학농민혁명 성역화사업의 확대 문제이다. 현재 황토현 중심의 성역화사업을 동학농민혁명의 첫 봉기가 있었던 고부까지 확대하여 말목장터에서 영원을 거치는 길과 천치재를 넘는 동학길 조성, 고부관아, 사발통문 유적, 당시 무기고 등의 복원과 이를 한 묶음으로 엮는 일명 동학농민혁명권 관광벨트 사업이 시급하다.
역사가 바로서지 않은 나라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다.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 조선시대 그리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천년의 역사와 사연을 고이 간직하고도 빛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고부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옛것을 후세에 계승보전하고 고부를 정읍발전의 또 하나 축으로 삼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