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잘미떡의 친정나들이
맨잘미떡은 우리 어머니의 댁호(宅呼)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렇게 부른다. 전라도 토속적인 냄세가 물신나는 댁호 맨잘미떡, 사투리로 맨잘미이지만 행정구역 명칭으로 하면 부안군 동진면 매잔리이다.
지금부터 60년이 휠씬 넘긴 해에 부안김씨 집안에서 출가해왔다 어머니의 연세는 올해로 82세, 8남매의 막내인 촌놈을 마흔 세 살에 봤다고 자랑삼아 늘 말씀하시던 어머니, 촌놈 낳기 몇시간 전에도 널을 뛰었다고 자랑하는 어머니는 아마도 장사였나보다. 아님 7남매를 낳다보니 애 낳기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는지 모르지만 그런 어머니가 이제 극 노인이 되어 진손주까지 보셨다.
어릴적 기억에 어머니는 한때 많이 아프셨다. 생사를 가름하는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큰방에는 할아바지.할머니가 거처하시고 정지(부엌)방에는 아버지.어머니께서 거처하셨다.
외양간 방에는 형님들이 그리고 마당건너 아랫채에 있는 아랫방에는 사랑방처럼 사용해 왔다.
한때는 둘째형의 신혼방이기도 했지만 내 나이 대여섯 되었을까 지금 우리 둘째정도되어 세상 물정 모를 것 같지만 촌놈은 그때를 기억한다.
“네가 크는 모습 보지 못하고 내가 죽게되었다”
며 목메어 눈물만 흘리시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손을 잡고 촌놈도 그 두려움에 한없이 울었다.
“어머니 죽지 마"
"제발 죽지마! 어머니!"
라고 어머니의 가슴에 파묻혀 한없이 소리 내어 울었다.
어릴적 기억이지만 죽음이라는 두려운 존재를 일찍 알았던 것인지 그때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 어머니가 지금까지 생전에 계시고 여든 두 살의 노구를 이끌고 친정어머니 제사 모시러 가신단다.
지금도 내일 모레 자신도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변함없이 맷밥 올릴 맷쌀을 정성껏 준비해서
“내가 시집와서 몸져 눕지 않고서는 줄곧 친정아버지 지앙(재앙)모시러 안 간 적이 없다”
“그러나 지금은 걸음걸이가 예전같지 않아야”
하시며 지난 설날에 지사리 집에 갔을 때 모처럼의 부탁을 받았다.
“너희 외할머니 지사(제사)때 니 차좀 가져와 나좀 맨잘미에 태어다줘라”
“너희 큰 눈님도 간다더라” 하셨다
전에 한 번도 그런 부탁 안하시던 어머니가 부탁을 한 것이다.
“이제 걸을 심(힘)도 없고 버스 오르랑 내리랑 헐 심도 없어야”하며...
어느 시골이든 교통편이 그렇듯이 시내버스가 생긴이래 자기네 관할시군내만 버스를 운행하다보니 관내 다니는 것은 어렵지 않는데 인근 부안이나 줄포나 갈려면 버스를 여러번 갈아 타지 않으면 않되는 처지이고 보면 노인들만 사는 촌의 교통은 말그대로 엉망이다.
고향 지사리에서 어머니가 친청에 갈려면 시내버스를 두 번 갈아 타야 한다. 먼저 동네 앞에서 평교(부안백산)까지 정읍시내버스를 타고 가서 거기서 다시 부안읍내까지 가는 부안시내버스를 타야 한다.
그리고 부안읍내에 도착하면 동진면까지 가는 시내버스를 타야하니 노인네로서는 여간 단단한 일이 아닐수 없다
촌놈 역시 어릴적 어머니따라 외할아버지 제사 모시러 따라 다녔다. 그러나 어릴적 기억은 외갓집이 왜 이리 멀기만 했는지 지금에야 차 몰고 가면 30분 남짓 40여키쯤이나 되나 그러나 촌놈 기억에 외갓집에 무슨일 있어 한 번 갈려고 하면 어린마음에 참으로 힘들어 했다.
어머니는 맷밥 지을 쌀을 한 바가지 떠서 치로 까불어 정성껏 준비한 맷쌀을 머리에 이고, 교통편이 좋지 않아 한시간에 한 번 다니는 부안행 완행버스를 타고 부안읍내에 내리면 차시간이 맞지않아 기다리기 일쑤였고 기다리다 지쳐 그리 아니면 4~5키로를 단숨에 걸어 따라간다.
봄.가을은 그리도 괜찮다. 그러나 겨울이나 될라치면 부안읍에서 동진면 북풍을 안고 외갓집을 가는 기분은 당시 옷가지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촌놈으로서는 고통과 추위의 연속이었다. 어린마음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이었다.
어머니는 외갓집에 다녀오시면 이곳 저것 싸가지고 오셨다 집에 오자마자 큰 방마루(지금은 집을 개량하여 없어졌음)에서 큰 방문 열어 놓고 할아버지(당신 시아버지)께 늘 큰 절 올리셨다. 시아버지에 대한 귀가 보고인셈 이었다.
그리고는 부엌에서 술상 보고 이것 저것 싸온 것을 차려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챙기셨던 모습이 지금도 한편의 영화처럼 생생하다
그런데 오늘은 촌놈이 직접 운전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외갓집에 가게되었으니 옛날 생각이 날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환갑넘은 큰딸과 쉬운을 바라보는 둘째 딸에다가 막둥이까지 가게되었으니 어머니로써는 맘적으로 뿌듯할 것이다.
앞으로 어머니께서 친정 아버지.어머니 제사모시러 몇번이나 더 다닐실 수 있을지 ........
1997년
지금부터 10년전의 얘기다
그 때만 해도 거동에 불편이 조금 있을 뿐 말씀도, 식사도 잘하셨는데
2003년 갑자기 찾아 든 치매가 결국 1년 뒤 생을 등지게 할 줄 누가 알았겟는가
노인의 병이란 하루를 예측 못하는 거지만...
설을 지내고 마흔 아홉번째 생일을 맞아 보고픈 당신을 그리며 10년 전 적어 놓았던 어머니에
대한 글을 옮겨 놓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