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년만에 복원된 되재 성당(2009. 10. 24 축성)
(라푸르싸드, 죠스 신부의 묘)
되재성당의 후신인 고산성당
되재성당의 유래는
박해를 피해 고산지방으로 숨어 들어 온 신자들이 모여들고 이에
1891년 우도신부가 차돌박이(현 완주군 운주면 구제리 백석)에 성당을 건립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893년 4월 비에모(우일모)신부가 부임하여 그 다음해인 1894년 정월 이 곳(완주군 화산면 승치리 원승마을)에 성당 신축을 시작했으나
동학농민운동으로 전라도 교회가 핍박을 당하자 일시 서울로 피신하였다가
1895년 초 다시 되재에 부임하여 성당 공사를 재개하여 1896년 11월 1일 뮈렐주교가 축성식을 갖어 탄생했다
이 되재 성당은 전통 한옥형태의 팔작 기와에 단층 5칸으로 되어 있었는데 충남 쌍계사 등의 절을 헐면서 나온 목재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 성당의 사료적 가치는 한국천주교회에서 서울 약현성당에 이어 두번째 세워진 성당일뿐만 아니라
한옥성당으로는 우리나라 첫 번째 성당이라는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06년 베르몽(목)신부는 이 곳 되재성당에서 애국계몽운동 일환으로 신성학교를 설립하였고,
1908년에는 태극계명학교를 세워 측량기술요원 등을 양성했으며
1929년 진산 지방리 본당을, 1935년 금산본당을, 1942년 수청리 본당을 분리시키는 등 번창하며
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성당주변에 큰 교우촌을 형성했었다
그러나 깊은 산골이었던 되재성당은 도시화로 쇠퇴하면서
1944년 수청본당의 공소로 전락하고 수청성당도 6.25전쟁중에 불타 본당이 폐쇄됨과 동시에
삼례본당의 공소로 되었는데 되재성당도 1950년 6,25을 거치면서 전소되고 1954년에 공소강당을 지었다
한편 고산성당은
1951년 삼례본당의 초대 주임신부였던 김영구(베드로) 신부가 관내의 폐쇄된 본당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본당 성립을 추진하기위해 노력하여
현재의 고산본당 부지를 매입하고 성당을 신축하게 되어 1958년 4월 25일에야 고산본당이 설립되는데
이로써 기존의 되재 본당과 수청 본당의 공소들은 모두 여기에 속하게 되었다.
고산지방은 이웃 동상, 경천, 화산등의 중심지역으로
1801년 신유박해이후 고산지역으로 숨어 들어 온 신자들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천주교와 연을 맺기시작하여
이웃 대둔산과 천호성지가 자리잡고 있는 천호산등과 함께 1866년 병인박해 때는 이 일대 저구리, 넓은바위, 다리실(천호), 차돌막이(백석)
석장리, 되재 등 교우촌이 무려 56곳이나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 고산성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지난 1994년 완공되었으며
성당 외곽은 한옥과 교회의 전통 건축양식인 바실리카 형식을 절충한 건물로 장방형에 종탑이 있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고산성당의 설계는 김승배(단국대 종교건축연구실)씨이며,
성당안의 '하늘과 땅과 만남'의 벽화는 인천 카톨릭대 조광호 교수의 작품으로
무명 순교자 피와 땀이 하나로 어우러진 신앙고백을 보여주는데
하늘과 땅, 그리고 둘 사이를 이어주는 19개 계단(지상의 12계당과 천상의 7계단)이 있고
계단 양편에는 생명의 나무가 있다
천상의 붉은 빛 십자가는 한국 순교자를 상징하고, 조선시대 형구에 나 있는 7개 구멍은 7성사를 상징한다
또한 좌우 생명의 나무는 고산지방의 특산물이요 우리 농촌을 상징하는 감나무로 땅과 농촌이 우리 삶의 근본임을 강조한다
2009년 10월
2005년부터 시작된 되재성당 복원은 종탑과 성당복원과 진입도로 개설, 주차장 및 화장실 마련 등을 마무리하고
전주교구 이병호 주교님의 주관으로 축성식을 갖고 114년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이웃 비봉면 내월리에 위치한 천호성지와 연계한 또 하나의 성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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