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 앞 우리 네가족 봉헌초)
(경당 내부)
(교육관 내부)
생거진천, 지금은 교통이 발달되어 살기 좋은 곳이지만 조선조 말 길이 나지 않고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이 곳 진천은 박해시대에는 교우들이 숨어들기 좋은 천혜의 요새였다
위치적으로 경기도와 충청도, 경상도 경계지역이자 산세가 험하여 박해시대에 교우들이 각 지방으로 은밀한 연락이나 밤을 틈타 도주가 용이한 곳이었다.
성지 백곡공소는 당시 순교한 두분의 무덤을 공소 경당 정문 앞에 모셔놓고 뜻을 기리고 있다.
소박하고 단아한 백곡공소는 박해시대에는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가 1961년 7월 현 위치에 정착하여 진천성당 백곡공소로써 저 밑바닥 신자들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공소 경당 정문에 잠들어 있는 두기의 묘는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병인 박해 당시 순교한 남원윤씨와 밀양 박씨 성을 가진 바르바라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데 이들은 시누이와 올케간이다 본디 남원 윤씨 집안은 본래 홍주(지금 홍성)에서 살다가 윤행윤때 박해를 피해 배티 골짜기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곳에서 병인박해를 당해 행윤의 손자 며느리인 밀양박씨 바르바라(윤행윤의 손 윤태명 요셉의부인)과 손녀 윤씨 바르바라가 함께 체포되어 신앙을 굳게 증거하다 매를 맞아 순교했고 그 시신은 가족들에 거두어져 배티 뒷산 성재 순교자 묘역 위 아래에 안장되었다. 1977년 순교자의 후손들이 묘를 선산으로 이장하기 위해 배티를 찾았을 때 이를 알게 된 백곡공소 신자들이 그 후손들을 만나 교회에서 대대로 잘 보살피겠다는 약조로 설득하여 두 순교자들의 유해를 백곡 공소 경내에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지를 찾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 이가 있었는데 백곡공소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김영구 유스티노 선교사였다. 교육관으로 안내한 유스티노 선교사는 손수 커피를 끊여 내 놓으시면서 공소 신자가 60여명에 불과하다며 시간이 갈수록 시골지역이라 노령화에 따라 공소운영에 어려워진다고 토로하고 지금도 마을을 찾아 밤낮으로 교리에 힘쓰고 있다고 덧 붙였다
이 곳 백곡성지는 이웃 최양업 신부가 머물며 사목활동을 했던 배티 성지와 최초의 조선교구 신학교가 있었던 옛 신학교 성당, 사제관 그리고 6인묘, 14인묘, 삼박골 순교자 묘와 연결하는 순례코스로 둘러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박해기 진천지역 사목(본당) 중심지 초대 담당사제는 성 안돈이 안토니오 주교 순교자였고 제2대 담당사제는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 증거자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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