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언부언

수돗물 먹어 얼굴 뽀얀 도시사람이 부러웠다

goldenfiber 2006. 5. 12. 09:12
 

수돗물 먹어 얼굴 뽀얀 도시사람이 부러웠다


우리가 객지에 나가 말을 하다보면 무의식중에 태어나고, 커온 지역의 사투리를 하게된다.

같은 전라도라 해도 광주.전남의 사투리와 억양은 우리 전북보다는 강하고 억세다.

그래서 우리 전북사람은 서울 말 배우기가 쉬워도 그쪽 사람들은 서울에서 사용하는 표준어를 흉내내기란 참으로 어려움이 많다.

김대중대통령이 지금도 벼를 두고 ‘나락’이라고 하고 있는 것도 그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60~70년대 경제개발을 외치던 그 시절 먹고살기가 매우 힘들었을 때였다.

한집에 보통 7 ~ 8명의 자식새끼를 낳아 "지가 먹을 몫은 타고 난데여"하며 대 집단을 이뤘던 그 때 였다

하긴 우리 집도 한때는 식구가 16명까지 있었으니까

물론 그때 당시 상황이야 애기를 낳아 세살 정도는 넘겨야 생을 살아 나갈 자격을 병마로부터 인정받던 시대였다

 

그것은 온갖 질병과 싸워 이기는 자만이 그들의  

그것은 온갖 질병과 싸워 이기는자만이 그들의 생활을 향유할 특권을 부여 받는 약육강식시대와 다름 없었다.

이렇듯 먹고 살기가 어렵다보니 교육열은 있어도 재정적인 뒷받침이 없는 우리네 부모네들은 자식들을 서울로, 도시로 몰아 세울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때 당시 유행한 것이 김희갑과 황정순이 나오는 “팔도 강산”이란 영화 아닌가

잘 가르쳐봤자 큰 아들 하나 달랑 고등학교까지 가르쳐 눈을 띠게하고 그 나머지는 방치하다시피 했다.

어떤집은 잘해야 국민학교(초등학교) 졸업시켜 내 놓아도 남에게 둘리지는 않는다며 새끼들을 내몰았다.

그러다 보니 ‘공돌이’‘공순이’가 생겼고, 그 때만해도 남의 집에서 밥이나 얻어먹고 집안살림을 다해주는 ‘식모’라는 직업아닌 직업도 사회적으로 보편화 되었다.

그때야 생계유지가 우선이다 보니 살기위해 먹고 살았야 했고  노임은 형편없고 인간적인 대우, 근로자로써 대우라고는 아예 생각하지도 못하고 접어 놓아야 했다.

아니 생각을 못했다기보다는 상상조차도 못했을 것이다.

 

인간적인 대우, 노임의 현실화를 요구하는 자는 배부른 소리, 행복의 비명으로 들릴 수 밖에 없는 시대였다.

그러니 최저 생계비도 턱 없이 못미치는 돈으로 자취하며 그나마 먹지도 입지도 않고 모은 돈을 고향에 목돈을 보내어 송아지도 사고, 돼지새끼도 사면서 집안살림을 늘리어 나갔다.

이 덕분에 일부 고용주들은 저임금 노동력 착취가 보편화 되었다.


무작성 상경, 이촌향도(移村向都), 굶주린 배를 움켜주고 무작정 서을로 서울로 향했던 그들이 일궈낸 일들은 오늘날 세계에 우뚝선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기초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분들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우리산업은 아직도 후진국을 면치 못했을 것이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화적, 경제적 혜택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에야 지금의 시각으로 오늘까지 이끌어 온 그들을 성장방법에 대해 성토하고 있어 아쉬움이 있지만 당시의 시각으로 돌아가보는 노력이 없다는데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그때 촌 사람들의 생각으로 가장 부러웠던 것은 수돗물 먹고 얼굴 뽀얀 도시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고, 양복 한 벌, 뾰족구두 한켤레, 서울 말씨 한번 써보는 것이 그네들의 소원이었다.

명절이라도 닥칠라치면 있는 멋, 없는 째 다 내고 금의 환향 했었다.

그러니 서울 한 주일 다녀와서 바로 서울 말씨를 흉내냈던 천부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제게 나락(벼)나무니?” 

“치간(화장실)이 어디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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