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산시 해미면에 위치하고 있는 해미성지는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당시의 참혹한 순교자들의 처형 광경을 그린 성당내 벽화
교수형 도구
십자가의 길
호야나무 2세, 호야나무 1세는 해미읍성 안에 불구가 된 몸으로 당시를 말하고 있다.
이 봉분은 생매장터에서 수습된 유해를 안치한 곳이다
진 둠벙, 이곳에 수많은 천주신자들이 줄줄이 묶여 수장 되었다
해미 고을은 지금은 행정구역상 해미면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조선 초기에는 병마 절도사가 근무하는 곳으로 당시 군사요충지상, 행정관리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1790년부터 1890년까지 100여년간의 해미진영은 관내 수많은 천주교 신자를 박해하는 역사적 현장으로 존재하였다
그 증거들은 이곳 여숫골에 인접한 당시의 관아였던 해미읍성 곳곳에 그 잔재가 남아 있다
이 박해 동안 해미 진영에 있는 두채의 큰 감옥에는 잡혀 온 교우들로 넘쳐 났고,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교수형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슬처럼 사라져 갔다
특히 이곳에서는 처형해야 할 천주교신자들이 너무 많아지자 당시 관원들은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어치는 자리개질 방법으로 처형을 하거나 여러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으로 떨어 뜨려 한거번에 죽이는 방법까지 동원되기도 하였다.
또한 1866년 병인년에서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 박해때에는 시체처리를 쉽게 하기위해서 서녁들판에 아무데나 땅을 파고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 넣고 흙과 자갈로 덮어 버리는 생매장까지 동원이 되었는데
그 당시 스러져 간 순교자들이 그 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1,0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그들 중 70여명만 이름과 출신지가 알려지고 나머지는 무명으로 순교한 분들이다
'예수 마리아'를 부르는 기도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 듣던 주민들의 입을 통해 '여숫골'로 전해오던 이곳은 1935년 발굴작업과 1975년 순교탑 건립, 1983년 생매장지를 확보하여 사적지 조성작업을 본격적으로 하고 1995년 서산 상홍리 공소 뒷산에 안장되어 있던 생매장 순교자들의 유해를 순교 탑 아래로 옮겨 안치하는 등 지금은 그 생매장터인 진둠벙이와 14처 노천성당으로 단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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