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에 위치한 지석리 성지
정문호, 손선지 두 성인은 고인돌 지방에서 출생,
성 정문호(1802)는 천주교에 입교하여 관직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몰두하였으며 성 손선지(1820년)는 출생하여 16살에 성 사스땅 정신부부터 전교회장직을 임명받아 복음전파에 주력하였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가족들을 거느리고 함께 이 곳을 떠나 신자들의 은신처인 전주 소양면 신리골에 정착하여 더욱 열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1866년 병인 12월에 체포되어 배교의 고문과 유혹을 뿌리치고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당하였다.
1968년 10월 6일 복자(福者)품위에 오르고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일인 1984년 5월 6일 성인(聖人)품에 오르니 후손 손유신이 이 부지를 희사하여 기념비를 세운다
서기 1988년 12월 13일(현지 기념비 전문)
한국 천주교 1백년 박해사에서 가장 혹독한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성인 한재권과 함께 당시 군부대 훈련장이었던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치명한 두 성인의 유해는
완주군 천호성지에 묻혀 있다
이들 두 성인은 팔이 부러지고 살이 터져 나가는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았고 형장에서 오히려 축복의 순간을 맞는 기쁨에 넘쳤던 것으로 전해진다
어려서 입교한 손선지(베드로, 1820-1866년)는 열심한 신앙으로 이미 16세 때 사스탕 신부로부터 회장으로 임명되어 순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
병인박해 때 그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골에 살며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해 12월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잡혀 전주 감영에서의 신문 중 회장임이 탄로난다.
그리하여 손선지는 공소를 거쳐간 서양 신부와 교회 서적의 출처를 알려는 관헌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나 끝내 신앙을 잃지 않는다
더욱이 그는 옥중에서도 회장의 직무를 다해 갇혀 있는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했다
12월 13일 그 대성동, 성지동 등지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 유해는 전주 선천교를 요마루재와 우상리 뒷산에 묻혔다가 그 아들에 의해 이곳 에 옮겨졌다
양반의 집안에서 태아나 원을 지낸 적도 있는 정문호(바르톨로메오, 1801-1866년) 성인은 임천(지금의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에서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는 교우들 뿐만 아니라 외교인들에게 조차 깊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 뒤 박해를 피해 고향을 버리고 여러 지방을 유람하다가 병인박해 때에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골에 살았다.
그 해 12월 초 사람을 보내 전주 감영의 동태를 살피기도 했는데 소식을 미처 듣지도 못하고 12월 5일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붙잡혀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 했다.
아직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두 성인의 출생지, 우리 전주교구와 많은 인연을 안고 전주교구에서 순교한 두 성인,
팔충사 옆에 자리 잡은 지석리 성지는 눈여겨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법한 이정표 등이 아직은 많은 사람들의 정성과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남쪽보다 빠른 개화를 앞둔 산수유가 작년에 채 지지 않은 말라 비틀어진 열매와 만나고 있었으니 올해는 좋은 일이 있을려나 보다
(전주 숲정이 성지에서 병인박해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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