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금사리 성당

goldenfiber 2014. 3. 21. 22:13

 

 

 

 

 

 

 

 

 

 

 

 

 

 

시골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금사리 성당

 

구한말 천주교가 이 지역에 들어 오면서 1906년 부여군에 세워진 최초의 성당이다

성당의 외부를 붉은 벽돌과 회색벽돌로 장식하였고, 창문의 윗부분은 둥근 곡선을 이루어 겉모습이 정교하면서도 우아하다.

특히 본당 안 중앙에는 나무 기둥을 세워 방의 마루를 둘로 나눈 2량씩으로 구획하여 남,여 좌석을 구분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성당 안을 3량식으로 하는 일반적인 수법과 달라 특이하다.

우리나라 전통 목조 건물의 특징을 많이 갖고 있는 초기 성당 건물중의 하나로 아담하면서도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143호(성당 안내문)

 

부여 지역은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어 1801년의 신유박해를 전후해서는 이미 찬주교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뮈텔 주교는 1900년에 신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부여 지역에 본당을 신설할 것을 결심하였고, 1900년 10월에 입국한 공베르 쥴리앙 신부가 파견되자

공베르 신부가 정착하고자 한 곳은 갈덕리나 규암(현 부여군 규암면)이었으나 마침 소양리에 적당한 장소가 나타나면서 이곳이 본당 중심지가 되었다.

처음 본당의 이름은 당시의 행정구역명을 따라 홍산 성당(鴻山聖堂) 또는 소양리 본당으로 불리었으며

당시 공베르 신부가 매입한 것은 흉가로 여겨지는 가옥 3동과 대지, 논과 산 등이었다.

 

이후 신자들은 공베르 신부가 고용한 중국인 기술자와 함께 성당건립 공사를 시작하여 1906년 성당을  완공하고 계속하여 사제관과 사랑채를 완공한 뒤

1913년 9월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설립 당시 본당의 관할 구역은 충남 남서부 지역(부여군, 논산군, 청양군, 예산군 일부, 홍성군, 서산군 안면도, 보령군, 서천군)이었으나

1908년 합덕 본당에서 수곡 본당(서산 본당의 전신)이 분리되면서 서산군 지역을 새 본당으로 이관하였다.

이후 공베르 신부는 23년간 본당에 재임하면서 성당 시설을 완비하는 한편 전교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1902년 17개 공소에 신자수 882명이었던 것이

이듬 해에 이미 1,000명 이상으로 증가하였고, 1923년에는 26개소 공소에 1,644명을 기록하였다.

 

그 후 본당은 어느 정도까지는 성장을 계속하였지만 본당 신부의 잦은 교체와 관할 구역의 축소로 어려움을 겪게된다

제3대 정규량 레오 신부는 1924년에 성당 사랑채에 2년제 계명여자 학술 강습회 2학급을 신설하여 주민 교육을 1932년까지 실시하였으며

제4대 이여구 마티아 신부는 청년회를 조직하여 개척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성당지붕을 개량하고 1936년 서천 본당을 분리하였으며

제6대 김영식 베드로 신부는 목조초가 수녀원을 건립하고, 부인회를 조직하는 등 선교와 주민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6.25 전쟁에는 제9대 몰리마르 요셉 신부는 성당과 부속건물이 몰수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성당을 지키다가

1950년 8월 체포되어 그해 9월 대전 작은 형제회 수도원 지하실에서 총살 당하였다. 

이 같이 금사리 본당은 경제개발 시기를 보내면서 인근 지역의 본당 신설과  주민 소득과 계몽활동을 계속 전개하였지만

여느 농촌처럼  이 곳도 예외가 아니어서 대도시로 빠져나가는 인구의 대이동으로 1920년대 번창했던 성당의 모습은 점차 쇠퇴해 가기만 했다.

 

본당은 지붕을 기와에서 함석으로 바꾸고, 지붕 트러스를 보강했으나 건물이 기울어져 1968년에 74평의 콘크리트 블록조 성당 건물을 옛 성당 옆에 새로 건립하였다.

또한 옛 성당은 여러차례 부분적인 복원 공사를 시행했으며, 전면적인 복원 공사는 2006년 옛 성당 건립 100주년을 앞두고 2003년부터 대대적인 복원 작업에 들어가

2005년 3월 공사를 마쳤는데 종탑 복원과 지붕의 동판으로 변경에다, 벽 전체를 헐어 다시 쌓고 벽돌은 원래 재료를 30%이상 사용하여 복원했다.

 

필자가 방문한 성당은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본당의 내부를 볼 수가 없었고 시골에 위치한 본당인만큼 여느 농촌지역의 쇠락하여 큰 힘을 잃고 있어 보였다.

그러나 1900년대 충남의 한 지역의 믿음을 지켜 온 성당인만큼 지나 온 발자취를 잘 간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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