智士 칼럼(신문)

무성서원과 착한정치

goldenfiber 2020. 8. 18. 14:36

무성서원과 착한 정치(善政)

 

김 철 모(시인, 전 익산부시장)

 

무성서원은 2019년 안동의 도산서원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정읍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은 통상 서당, 서원, 향교, 4, 성균관이 있었다. 서당은 지금의 초등 교욱기관이었고, 향교는 지방의 중등교육기관이었으며, 4학은 한성을 중심으로 한 중앙 중등교육기관, 성균관은 국립대학이라 할 수 있다. 반면 한국 서원은 조선시대 16세기중반부터 성리학 교육과 선현 제사에서 출발한다. 이는 사림세력이 정치를 주도하면서 사학(私學)으로서 서원을 설립하여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후 향교는 점차 교육적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원과 향교가 다른 점은 서원은 우리나라 선현을 배향하나 향교는 중국 선현까지 배향하는 점이다.

 

무성서원의 태동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신라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선생이 지금의 칠보태인지역인 태산태수로 부임하여 8년간 선정(善政)을 베풀고 많은 치적을 남기고 이임하자 주민들이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생사당을 세우고 태산사(泰山祠)라고 한데서 유래 되었다. 이후 1544(중종39) 태인 현감으로 부임한 신잠(申潛)선생이 6년에 걸쳐 선정을 베풀다 강원도 간성군수로 이임하자 주민들은 역시 생사당을 세원 배향하다가 고운 선생의 태산사와 합하였다. 그후 1615(광해군7) 고을 유림들이 태산서원을 세웠는데 1696(숙종22) 무성서원(武城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불후헌 정극인, 눌암 송세림, 묵재 정언충, 성재 김약묵, 명천 김관 선생을 추가로 배향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성서원이 가장 특별한 점은 세계유산에 등재된 여느 서원들과 달리 마을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과거시험위주 교육보다는 누구나 배움의 욕구가 있으면 신분과 계급을 떠나 그 기회를 준 백성 속에 서원이란 점이다. 비록 다른 서원처럼 웅장하거나 건축물이 많지는 않지만 결코 초라하지 않고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다. 1868년 서슬파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헐리지 아니한 도내 유일한 서원으로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에는 면암 최익현과 둔헌 임병찬 선생이 일제침략에 항거하기 위해 호남의병을 창의한 역사적 현장이기도 한다. 뭐니 뭐니 해도 무성서원의 큰 의미는 관리의 선정(善政)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우리의 자랑거리다. 이런 면에서 관리는 결코 썩지 않아야 하고 오직 백성만을 보고 정사를 봐야 한다는 교훈을 시사하니 오늘날 집권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크다.

 

등재된 서원중 실질적 산수화 형태로 그려져 있는 곳은 도산서원과 무성서원밖에 없는 만큼 우리가 할 일은 석지 채용신이 1910년 그린 칠광도(七狂圖)’를 보물 지정을 추진하고 서원과 기존 마을과 옛 모습으로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도 고민해야 한다. 또한 무성서원 배향 인물에 대한 공적을 더 발굴하여 후세에 남겨야 한다. 무성서원을 정읍시 브랜드로 활용하여 시에서 발행하는 각종 문헌, 기념품은 물론 정읍에서 생산되는 특산물 등에 상표로 디자인하여 우리의 자랑거리를 알리고 보전과 함께 내장산, 김명관 가옥과 연계 관광자원화 사업이 필요하다.

 

특히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정치형태는 백성을 위한 착한 정치라기보다는 끼리끼리 정치, 문제가 생기면 진영논리로 몰고 가 본질을 흐리는가하면 국민한테 위임 받은 권력을 사익추구에 활용하는 일들이 난무하고 있어 모든 위정자들은 무성서원이 품고 있는 백성을 위한 선정(善政)이라는 숭고한 뜻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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