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해외)

남경 대학살 기념관

goldenfiber 2015. 11. 15. 17:14

 

일제의 학살로 죽은 아이를 부둥겨 안고 울부짖는 어머니의 모습을 형상화한 상징물

 

 

 

 

 

 

 

 

각국 나랏말로 조난자 300,000명을 적어 놓은 벽체

전 세계 공통어인 영어와 중구어, 그리고 가해자인 일본어로 기념관을 설명하는 것이 이색적이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증언록 들

 

 

 

 

 

 

 

 

담장에 절규하는 손을 형상화 하였다.

 

남경대학살

중일 전쟁 때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한 일본이 군대를 동원하여 중국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그 숫자가 자그만치 3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6주간에 걸친 살육은 오늘날 중국에서는 이를 난징 대도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당초 일본은 중국을 쉽게 점령되리라 예상했지만 상하이 전투가 장기화되고,

오송 상륙작전에서 무모한 작전으로 많은 피해를 입자 일본군은 중국군에 대한 적개심에 불탔으며

난징으로 진격하는 동안 중화민국 정부는 난징을 포기하고 중경을 임시수도로 정한다고 발표한다


이로써 특히 일본이 난징을 공략하면서 투항을 요구 했으나 당시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唐生智)장군은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버티게 되자 일본은 더 적개심을 갖는다

중일전쟁 당시 110만명에 육박하던 난징인구는 부유층과 상당수 시민들은 피난에 나섰으나 탕셩즈 사령관 휘하의 15만명이 투항을 거부하자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에 들어간다. 헌데 중국군은 큰 소리치던 것과 달리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무참히 무너졌다.

더구나 결사항전을 다짐하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 자신의 휘하 부대와 난진성에 고림된 시민을 뒤로한 채 양쯔강을 가장 먼저 건너 도망쳤다. 

 

이에 따라 난징을 벗어나지 못한 50~60만명의 시민과 군인들은 공항 속에서 6주간 일본군에 의해 철저하게 살육을 당하고 만다

일본군은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군인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들을 색출하여 닥치는 대로 성외곽이나 양쯔강 하구에서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으며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만여 명 단위로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으로 하거나 목 베기 시합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일본의 학살은 총알을 아끼기 위해 산 채로 파 묻어 생매장 당하거나 칼로 난도질 했다.

또 일부 일본군 장교들은 누가 먼저 칼로 100명의 목을 베는지 시합을 하거니 여자들과 어린아이등 수 많은 민간인들도 집단으로 묶어 놓은 뒤 여기에 석유를 쏟아 붓고 기관총을 난사하여 타 죽게 만들기도 했다.

일본군의 만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여성들을 상대로 한 온 갖 못된 짓을 행한 후 참혹하게 살해하기도 했는데 10대에서 70대 노파까지 가리지않고 행했다.

 

전쟁에서 전투로 인한 군인과 일부 국민들의 피해가 있지만 이처럼 고의적으로 선의적인 시민들까지 학살한 것은 그 사례를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일본은 난징 대학살에 대해서 이를 부인하거나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것은 자신들도 이첨럼 참혹한 만행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심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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