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무호남(若無湖南)이요 시무국가(是無國家)라"
직역하면
만일 호남이 없어진다면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라
원저를 보자.
李忠武公 全書(卷13) 附錄(5) 紀實(上)은
정조대왕의 명령으로 규장각문신 윤행필(후 이조판서)와 예문관검서관이 편찬 정조 19년에 출판하였다
여기에 '약무호남'이요 '시무국가'라는 문귀가 나온다
여기에 잠시 옮겨보자
舜臣每戰勝 輒戒諸將曰 광勝必驕(순신매전승 첩계제장왈 광승필교)
순신은 언제나 싸움에 이길 적마다 모든 장수를 훈계하되 사람이 이기기만 하면 반드시 교만이 생기는 법이니
諸將愼之 時賊屢窺湖南(제장신지 시적루교호남)
여러 장수들은 조심하라 하였다. 그때 왜적이 자주 호남지방을 노리고 있음으로
舜臣以爲 國家軍儲 皆고湖南(순신이위 국가군저 계고호남)
- 순신은 우리나라의 군비는 다 호남을 의존하고 있는데
若無湖南 是無國家也(약무호남 시무국가야)
- 만일 호남이 없어진다면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先時 賊將平行長 到平壤投書曰 舟師十餘萬(선시 적장평행장 도평양투서왈 주사십여만)
일찍이 적의 장수 行長(소서행장)이 평양에 이르러 편지를 보내어 수군 10여만 명이
又從西海而來未知 大王龍馭 自此何之 盖賊本欲(우종서해이래미지 대왕용어 자차하지 개적본욕)
또 서쪽 바다로 올라오는데 대왕의 행차는 언제 어디로 갈 것이오, 대개 적의 본의는
水陸合勢西下 賴此一戰 遂斷賊一臂(수륙합세서하 뇌차일전 수단적일비)
수륙으로 합심하여 서쪽으로 내려갈 계획이었는데 이 한 싸움으로 말미암아 적의 한 팔이 끊겼으니
行長雖得平壤 勢孤不敢更進(행장수득평양 세고불엄경진)
행장 비롯 평양을 차지했지만 세력이 외져서 감히 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상이 李忠武公 全書에 나오는 말이다
('불멸의 이순신' 촬영장면-선상과 궁항 좌수영세트 해변 )
일부 자료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이 왜 호남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는가 하는 것이 답이 나온다
그 이유를 세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호남지방은 당시 국가의 군량미를 대는 전초기지로서 역할을 다 하였다.
지금이야 쌀이 천대받는 세상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전쟁에서는 군량미와 전쟁을 수행하는 병력,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백성들의 사기가 승패를 좌우하는 가장 큰 요인일 수 있다
물론 임진왜란때 무기에 있어서 우리나라는 활과 칼, 그리고 창이 주 무기였다면 일본은 조총이라는 신식무기의 등장으로 조선이 초토화 한 면 또한 있지만 그때야 말로 식량이 전쟁수행에 있어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 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단기로 끝나는 전쟁이라면 몰라도 2~3년을 이어지는 장기전쟁은 군량미의 공급여하에 따라 전쟁승패가 결정되었으니 말이다.
둘째, 호남에는 전국에서 가장많은 의병이 일어난 곳이다.
전국 경향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유독 호남지방에서 의병의 봉기는 그 숫적인 면에서나 규모면에서 가장 많았다.
광주,담양,남원에서 활동한 김덕령, 금산의 조헌. 영규대사, 나주중심의 김천일, 장흥,담양의 고경명장군등이 활동하여 당시 파죽지세로 몰리던 정부군의 빈자리를 채웠고, 식량의 보고인 호남을 지키는데 혼신을 다해왔다.
또한 해남의 임희진, 영광의 신우신등은 물론이고 특히 임계영,최경희 등은 멀리 경상도 거창까지 의병을 이끌고 왜적을 물리쳐 8도 의병중에 가장 강했다는 평이다.
(남원 만인의총 묘소)
더구나 정유재란 당시 민.관.군 이 합심해서 남원성을 지키다 순절한 의로운 만인의사가 남원 만인의총에 잠들고 있다
셋째, 해전의 명장 이순신장군의 승전보를 울린 수군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최영희 교수등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수군의 구성은 호남지방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전라좌수영(=전라좌도수군절도영)이 구성되었고, 영남지방 사람들은 주로 경상수군 소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 장군이 이길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호남사람들이 주류를 이룬 수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렇듯 호남의 중요성은 몇가지만을 제시해도 이해될만 하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성웅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장군의 개인적인 역량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온갖 모함과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1592.5월 옥포해전, 5월 사천포 해전, 7월 한산도 대첩, 9월 부산포 해전에 이어
1597. 9월 명량대첩, 11월 노량대첩에서 전사에 이르기 까지 3대첩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왜군의 침략에 나라를 구할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호남이 그 역할을 다해 주었기 때문이다 할 것이다.
(불멸의 이순신 촬영지인 전라좌수영(줄포 궁항)과 석불산영상랜드의 왜관거리)
전라도는 본디 현재의 전북과 광주, 전남, 제주를 아우르는 지금보다도 더 넓은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전주에 전라관찰사와 부사를 두고 관할하던 곳이다
비롯 이순신장군의 해전이 우리고장에서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이순신은 22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32살의 나이인 1576년 봄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와 충청도를 거쳐
1589. 2월 전라도 순찰사 이광의 군관이 되었고 순찰사의 주청으로 조방장과 선전관을 거쳐
1589.12월 초대 정읍현감에 부임하고
1591. 2월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전라좌수사)로 자리를 옮긴지 부임 1년만인
1592. 4월 임진왜란을 맞게 되는데
1593. 7월에 약무호남이요 시무국가라는 서한문에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인지 이순신 장군은 호남과 연고가 강했고, 미리 파악된 전라도의 정세등 이런 경험들이 남해 해전을 이끄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리라 예상된다.
(충렬사-초대 정읍현감이었던 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사당 )
이순신장군의 생애과 애국심을 다룬 드라마를 추진한 1년동안 전북도의 영상산업을 담당하며 '불멸의 이순신'을 우리고장 부안 등에서 촬영하고 방영케 하여 국민적 시청율을 기록하는데 일조를 한, 한 사람으로써
이순신 장군이 남긴 '若無湖南이요 是無國家'란 말이
이번 장마 피해를 보면서 새삼 외람되게도 촌놈이 태어 난 곳,
비롯 가진 것은 없어도 잘 보존되어 있는 자연자원과 훈훈한 인정이 흐르고 있는 우리 전라福도를 더 사랑하게 만든다.
최근에 경기도 광명시장이 공식석상에서 "전라도 놈들은 이래서 안된다"는 전라도 폄하발언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시점에서 공인은 모름지기 때와 장소를 가리고 가벼운 언행을 삼가해야 하는 것을 망각한 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면서
하계 휴가철과 이번을 계기로 자기가 태어 나고 자란 곳을 한번쯤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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