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추석에 대한 추억은 다 똑같나 봅니다
추석에 유일하게 인근 고부장에서 사온 고무신 한 컬레가 내 인생의 전부 였던 때가 있었다
10리 길 되는 대목장을 보러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 나서야만 그래도 하나라도 더 얻을 수 있기에
왕복 걷는 고충이야 당연히 감수 했었야 했다.
추석에 쓰일 생선이며, 과일은 물론이고 바리바리 이고 간 곡식 넘기고 남은 돈으로
시아버지, 시어머니 옷가지며 8남매 자식새끼들 고무신 한짝이라도 사서 주려고
먼 길 고갯짐을 마다 하지 않았다
추석 이틀 전이면
절구에 떡 방아 찧는 작은 할머니와 작은 어머니 옆에서 도란 도란 애기라도 나누는 도움이라도 있어야
시루 떡찌고 난후 시루에 붙어있는 시루핀(솥하고 시루사이에 공기 새지 말라고 쌀 이겨 붙인 것)이라고
한 볼태기 얻어 먹을 수 있었으니까
송편찌는데는 불이라도 지펴주어야 모양 비뚤어진 송편 하나 덕을 볼 수 있다
차례를 지내고 나면 음복이라해서
어른 들은 퇴주를 한 잔씩 나눠 마시고
애들은 밤이나 대추를 하나씩 먹으며 조상의 복을 이어 받으려 한다
우리 집은 유달리 제사가 많았다
그 덕에 늘 나는 동네 애들한테 부러움을 샀다
그래야 떡 한 조각이라도 얻어 먹을 수 있으니까
그것이 오늘에 와서 벌초를 해야 할 곳이 50기를 넘는데 기반이 된 모양이다
어머니는 큰 집안의 종손 며느리는 아니더라도
증조할아버지 손으로 하면 종손 며느리나 다름 없었다
선산이 집 뒤에 있기에 집안 대소사는 늘 어머니 차지 였다
남자처럼 당찬 어머니는 그래서 늘 행사의 주관을 맡아 보았고
남에게 좋은 말 할 줄 모르는 어머니의 성격 때문에
고생은 하고 좋은 평은 듣지 못했다
그러던 어머니는 노구에 찾아 온 치매를 이기지 못하고
거년에 살아 생전에 그리도 땀흘려 가꾸던
띠밭 가에 묻혔다
이제는 당신의 온기도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까칠가칠해진 손바닥 감촉도 느끼지 못한다
오직 있다면
2주전 두번째 깍은 어머니의 머리만 만져 볼 뿐이다
그 옛날의 추석은 다정다감했던 것 같다
없는 살림에 명절에는 늘 우리 집에 손님이 끊이질 않아 그 손님들을 치루느랴 어머니는
명절 끝에는 늘 녹초가 되었다
추석에는 집안 묘소들이 집 뒤 선산(서당봉)에 집산되어 있다보니 조상 묘를 찾는 집안들의
발 길이 끊이지 않았고
설에는 고조할아버지로 하면 둘째 집안이지만 연로하신 분들이 많이 사시다보니
세배객들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어머니 고추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 촌놈은
집안들이 많이 모여서 좋았고
먹을 것이 많아서 좋았다
고무신이라도 하나 얻어 신으니 더 더욱 좋았다
지금 이 나이먹어 자식 키우면서 이제는
그때 아무 없이 묵묵하게 대목을 준비하시던
어머니의 맘을 조금은 알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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