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레슬러의 큰 별이 떨어졌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그도 흐르는 세월 앞에 그간의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어릴적 그는 어린들의 우상이자, 국력이 열악하고 먹고 살기가 어려운 국민에게 대한민국인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희망을 주는 국민적 영웅이었다
흑백텔레비젼이 나온이래
생중계가 되는 운동경기는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지도, TV를 가진 사람이 적다보니 시청자 폭도 좁았다
생중계가 프로권투와 프로레슬링이 유일했던 때라서
더욱더 작은 텔레비젼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열광케 했다
생전 김일 모습/연합
60년대 후반
우리 동네에 TV를 소유하고 있는 집은 유일하게 아래돔(마을) 한 집밖에 없었다
그 집이 TV를 소유하게 된것은 결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고
당시 월남 파병이 한참인 때라 큰 아들이 월남에 파병되었다가 제대하면서
군대에서 쓰던 이런 저런 물품과 함께 탁상용 미제 흑백 텔레비젼을 하나 사서 집에 같이 보내 준것이다
당시 TV이라고 해봤자 요즘같이 칼라도 아니고, 메머드급도 아닌 탁상용 5~6인치 정도이니
사람들의 집중하기엔 너무도 작은 규모였다
그렇지만 규모에 상관없이 수신상태가 좋지 않은 TV도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힘은 대단했다
특히,프로레슬링 경기가 있는 여름 날이면 그 집 마당은 가설극장이 설치가 되어
그 작은 TV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나와 마루에 설치가 되는가 하면 마당에는 멍석이 넓게 펼쳐진다.
어른이고, 애들이고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경기시작만을 초조히 기다리고
광고가 끝나고 이내 본격적인 경기가 시작되면 모두가 숨죽이고 경기를 지켜 본다
일본의 안토니오 이노끼와 자이언트 바바, 알둘라 부처, 타이거마스크 등 당대의 쟁쟁한 상대선수에
비해 결코 유리한 체격조건이 아니어서 왜소하기까지 한 그였다
초반에 계속해서 공격을 당하고 그 들이 내리친 의자로, 입으로 물어뜯은 김일의 이마는 흑백TV로 봐도 선혈이 낭자한다. 그러니 보는 사람들이 어디 홍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계속된 공격으로 그로키 상태에 있던 그가 그의 특기인 박치기로 반격이 시작한다.
한방은 버틸지 모르지만 두방 이상이면 거구의 상대 선수들도 꼼짝 못하고 손사래를 치며 피해다니다가 연신 퍼 붓는 공격에 어쩔줄 모른다.
그동안 손에 땀을 거머주며 숨죽이고 보던 동네사람들은 여기에서부터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한다
김일이 박치기 할때마다 동네사람들은 똑같이 목에 힘을 주고 머리를 조아리며, 김일의 박치기에 견디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상대 선수를 보면서 연신 '그렇지' '잘한다'하면서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카운트 하나 둘이 몇번을 반복하다 '하나 둘 셋' 끝내는 김일승리
경기가 끝나고 허리에 타이틀이 채워질 때 사람들은 또다시 환호성을 높인다
이마를 붕대로 둘러감고 호랑이와 삿갓, 곰방대가 그려진 가운을 다시 입고 링을 한바퀴 돌때면 우리의 함성은 극치를 다다른다
경기가 끝났지만 동네 사람들은 그 자리를 떠날줄 모른다
'김일이가 최고여'
'저그덜이 아무리 쌔도 박치기 한방이면 백일 수 있간디'
'김일이 대가리(머리)는 쇠로 되었는개비여'
모두 한마디씩 주고 받으며 집에 돌아 가는 동안 화제는 계속해서 경기를 재구성하고 장외해설로 집에까지 이어진다
그러니 국민학교(초등)에 다니는 필자로서는 자신이 승자가 된 것처럼 흥분하고 어떻게 하면 김일선수
처럼 운동을 잘 할 수 있을 것인가도 친구들과 몇말 며칠을 재탕한다
생전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끼/연합
우리동네는 그후 TV가 2대가 더 들어 왔다.
한 집은 서울에서 귀향한 집인데
주인 아저씨가 서울에서 사업을 하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자 휴양도 하고 농사도 지을 겸 시골에서 살려고 귀향한 집이다
바깥 출입을 못하는 아저씨 때문에 TV를 설치했고 사람들은 체면 불구하고 TV를 시청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래도 그 집은 적적한 아저씨 입장에서보면 동네 사람들이 소식통이자 대화 상대가 되었기 때문에
서로간에 악어와 악어새 관계가 설정되었다
또 한집은 동네에서 대체로 농사를 많이 짓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으로
집안어른들을 위해 TV를 구입했지만 그 집마저도 시청객들로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동네에 TV가 댓수가 늘어 날수록
어른들은 몰라도 동네 애들한테는 TV시청의 기회가 넓혀지고, 선택의 폭도 넓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체면불구는 거의 매일 이뤄져 TV가 있는 그 집들은 사생활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여름철은 그래도 괜찮았으나 특히 겨울철은 포장되지 않은 동네길을 다니다가 옷가지에 얼어붙어 있는 흙을 죄다 그집 안방에 떨고 나오는 상황이 되어서 잠도 편하게 자지 못한데다 연속극이 끝난 그 집들은 매일 그때서야 집안 대청소를 해야 했다
밖에 다니면서 묻은 흙은 따뜻한 방에 들어가면 수분이 발산되고 말라서 옷에 묻은 흙이 자연스럽게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TV가 있는 집들은 불가피 출입에 대한 극약처방을 자체적으로 내렸다
매일 시청객(손님) 받는 것도 한계가 있고, 청소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불가피 하게
프로레슬링이나 권투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문호를 개방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해 버렸다.
그러나 그런 조치가 연속극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의 TV중독을 해소할 방법은 아니었다
그래서 니온 것이 매일 TV를 보려고 하는 애들한테 입장료가 부과 되었다
뚜렷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당시 5원정도이었던 같다.
그리고 여름날에는 대문을 걸어 잡그고 출입을 제한했고, 그중 대농은 고육지책으로 애들한테 TV를 보는 대신 잎담배를 5발정도 엮어주는 노역을 주문했다
지금은 TV가 없는 집이 없고, 공중파는 물론 케이블 TV와 인공위성에 전파를 직접 받는 PDF가 보급되고 극장식 대형스크린의 TV와 DMB가 등장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호랑이 담배 피는 애기지만
그당시 그것이 현실이었고 즐거운 추억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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