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지금

나의 공직생활9- 투표통지표 부도사건

goldenfiber 2007. 7. 11. 20:21
 

나의 공직생활⑨ - 투표통지표 부도사건


민주주의는 선거로 시작하여 선거로 끝난다고 한다.

대통령 선거로부터 총선, 지방자치단체장선거, 지방의원을 뽑는 선거는 물론 단위농협장 선거와 적게는 학교의 반장선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지금 선거판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거문화는 민주주의 발전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투명화되고 참여하는 구성원들의 의식수준도 높아지면서 더욱 발달하고 안정되어가고 있다.

 

촌놈 자신 선거종사원으로 현장에서 선거를 치뤘거나 투표에 참가해 오면서 20여년 겪었던 선거행태는 많이 발전되고 민주주의 성숙과 함께 익어가는 추세라고 느끼고 있다.

우리는 그만큼 잘못된 선거문화 때문에 엄청난 재정적 손실과 국민적 상처를 입어 왔었고, 지금도 완전한 선거문화는 아니지만 오늘날 선거제도와 선거문화가 정착되기까지 우리 국민은 너무 큰 대가를 그동안 치러왔다.

 

1985년으로 기억된다.

군청 민방위과에 근무할 때다.

당시만해도 선거가 있다면 읍면동 직원은 물론 시.군청직원, 도청직원까지 다 동원이 되어야만 했다.

그것은 투표율에 대한 정부의 관심도 있었지만 일선기관장들의 투표율 제고 부담감에 의한 반자동적 행동으로 나타났고 지금 생각해보면 주민에게 비쳐지는 공무원들의 그런 동원 모습은 그리 곱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이야 투표통지표를 전산으로 출력하고, 개표도 자동개표기로 하고 공무원과 주민과 접촉으로 인한 쓸데없는 오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하여 우편으로 송부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어찌 그랬던가

마을담당공무원들이 직접 마을에 출장 집집마다 방문하여 투표통지표를 직접 세대원에게 교부했었다.

하긴 그 옛날에는 투표통지표조차 빼돌려 아예 유권자에게 투표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일이 있었던 악몽이 자연스럽게 전 세대를 공무원으로 하여금 돌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S읍 모지역을 필자와 한조를 이룬 사람은 읍사무소 L계장이었다

낮에 둘이서 담당마을을 돌며 주민을 상대로 투표통지표를 돌리려 하였지만 다들 들에 나가 버려 도대체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

계속된 허탕 끝에 L계장의 제안으로 투표통지표 교부를 중단하고 있다가 6시가 넘어서 L계장이

'내가 저녁에 다돌아 다니면서 교부하겠으니 김주사는 들어가'

라는 말에 술 한잔을 나워 마신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필자는 전년도 11월 11일 결혼을 한 터라 신혼이었고,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선거관계로 하루종일 떨어져 있던 아쉬움이 많은 때였다

밤 11시쯤 되었을까 당시 셋방살이를 하는 촌놈은 집에 전화가 없었기 때문에 근처에서 슈퍼를 운영하는 처형 집을 통해 전갈이 왔다.

군청에서 급히 찾는다는 것이다.

잠자다 일어난 촌놈은 주섬주섬 옷을 주서입고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채 필자를 찾는다는 선거상황실에 들렀다

당시에 S 내무과장과 P모 행정계장은 나를 보자마자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도대체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야?”

“당신 출장가라고 했더니 어디서 뭐하고 집에서 편하게 잠이나 퍼자고 있어?”

어찌된 내용인지 영문도 모르는 필자는 일방적인 꾸중을 당해야 했고 한참을 얻어터지고 나서야 감을 잡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저녁시간에 다 돌리겠다며 장담했던 읍사무소 L계장이 그만 약주덕택에 통지표를 교부하지 않고 취해 버린채 종적을 감춰버려 투표통지표 교부 마감시간이 다 지나 갔는데도 교부결과를 보고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마감은 지어야하고 마을 담당한 계장은 연락이 되지 않고, 읍사무소에 비상이 걸리고 결국 10시쯤 되어서야 어떻게 마무리하고 필자를 부른 모양이었다.

더구나 당시는 투표통지표 교부상황이 군청상황실을 거쳐 도 상황실로, 내무부 상황실로 집계되는 때라 그 시간까지 결과가 나오지 않았으니 에사 일이 아니었고 비상이 걸릴 수 밖에...

지금이야 핸드폰이라도 있지만 당시야 어디 처박혀있으면 찾을 방도가 없었다

전직원을 동원하여 찾아낸 L계장은 술에 취해 통지표 꾸러미를 안은 채 어느 집에 잠이 들어 있었으니 황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당연히 그 불똥은 군에서 독려차 출장나간 같은 조원이었던 필자에게 떨어지게 되었고 밤중에 호출은 너무 당연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필자의 잘못은 차치하더라도 12시가 넘고 1시가 다 될 때까지 P모계장의 야단은 그칠 줄 몰랐다.

야단치다가 지치면 쉬었다가 조용할 만하면 또다시 시작하는 그 야비(?)함은 정말 극치에 달했다.

1시쯤 자신의 분풀이가 되었는지

 

'김0모씨! 거시에다 사유서 쓰고 집에 가. 형편없이 말야. 가만 두지 않겠어'

군청 문을 나오는 필자는 취기는 간데 없고 정작 투표통지표를 부도낸 L계장에 대한 서운함보다는 신혼에 무려 3시간이상 필자를 닦아세우던 P계장에 대한 서운함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이윽고 다음날 아침 간부회의에서 P모계장 덕분에 ‘00과 00모’가 거명되고 당시 필자의 과장이었던 R과장만 군수로부터 직원하나 단도리 못한다고 호된 꾸지람을 듣는 것으로 상황이 종료가 되었다.


세월이 15년쯤 흘렀을까 우연히 길거리에서 퇴임한 P계장을 만났지만 필자는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말았다.

그 사건이 있은 후 같은 과에서 근무할 시간도 있었지만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P계장이었기에...

아직도 “투표통지표 부도사건”으로 인한  P계장에 대한 선입감은 그리 달갑지 않다. 이를 두고 ‘자기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남만 탓한다’고들 이야기한다.

통상 그렇다.

야단을 친 사람은 쉽게 잊을 수 있겠지만 야단을 맞은 사람의 가슴에 남은 상처(?)는 오래 기억되게 된다.

가볍게 던진 농담 한마디가 상대방에게는 비수가 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