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지금

뿌리를 찾아서1-오토재

goldenfiber 2012. 5. 13. 22:18

 

 오토재, 경북 의성군 사곡면 토현리 602번지에 위치한 의성김씨 고려태자 첨사 김 용비 공을 모신 사당이 있는 곳이다

 오토산 신도비

 

 

 

 

 

 

사경당

 먼저 진민사에 모신 용비공 할아버지께 예를 갖추고 .......

 

 

 사당, 진민사  

 오토재에서 도 청년회장 인사말씀

도 종친회장 인사말씀

 

오토재 관리위원회 관리인 안내

 

 

 

 고려태자 첨사 김용비 할아버지 의성군 묘

 

특이한 것은 일반 다른 묘소와 달리 부인 강씨를 위에 두고 있다.

이는 오토산 정산에서 내려운 용머리가 이곳을 지나 밑으로 흘러 공이 머리부분에 먼저 앉고 그 뒤에 부인이 자리를 한 형국이다

 

사원지에서 바라 본 오토재와 오토산 정상

 

전라북도 의성김씨 청년회에서 조상의 뿌리를 찾아서 경북 의성군을 찾았다

이 곳은 의성김씨 9세손이자 의성군  김용비(金龍庇) 공이 묻히고 매년 봄, 가을로 후손과 지역민들이 공의 공덕을 기리며 향사하는

오토산 자락에 진민사와 오토재, 사경당이 있는 곳으로 언제부터인가 꼭 찾으리라는 염원이 성사된 이번 방문에 큰 의미를 담았다

 

'음수사원(飮水思源)', 물 한모금 마시면서도 그원천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로 

비록 물 한모금 마시지만 그 근원을 생각하며 샘을 만들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마시라는 말이다.

 

詹事公 金龍庇 公은

고려태자 첨사로써 고려 명종조 인물로 홍건적을 토벌하고 요양성 첨지 정사에 이르렀으며

정승에 이르러 추성보절 공신으로 의성군(義城君)으로 봉하였다고 전한다

부인은 영동정 강후주의 따님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백성들에게 공덕이 있어서 오래도록 백성들이

고을 가운데 진민사(鎭民祠)라는 사당을 세워서 세시로 향사를 드렸으나

구한말 서원철폐령에 따라서 공이 묻혀 있는 이 곳 오토산 자락으로 이거했다고 한다  

 

의성김씨 시조는

신라56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이며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자로 의성군에 봉해짐으로써 자손이 본관을 의성(義城)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의성 김씨가 실질적인 시조로 받드는 인물은

고려말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낸 9세손 김용비 공이고

비봉산성(義城)은 본디 경상북ㄷ 중앙부에 위치한 고장으로

삼한시대에는 소문국(召文國)이었고, 신라에 병합되어 757년(경덕왕 16년) 문소(聞韶)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초에 지금의 의성(義城)으로 부르게 된다

 

의성 김씨의 번창은 8세손 공우(公瑀)의 아들 대에서 크게 이뤄지는데

장자인 용비(龍庇)가 태자첨사(동궁에 속한 종2,3품 벼슬)을 지냈고,

차자는 용필(龍弼)는 수사공(守司空)을,

막내 용주(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명성을 날렸다.

 

따라서 이들 대에서 5개파로 나뉘어 세계를 이어오고 있는데 첨사공피,수사공파, 충의공파, 찬성공파, 선락장군공파 등이 그것이고

고려와 조선조에 군(君)으로 책봉된 사람이 7명이고, 시호를 받은 사람도 충의공 용주외에 용소공 영열, 문원공 원 등 13명이 된다

고려조에는 김공우 아들 3형제 외에도 찬성사를 지낸 김훤(金暄)과 우왕 때 도순문사를 지낸 김광부, 13세손인 정당문학을 지낸 문학공 김거익,

삼국사기 발문을 쓴 김거두가 있다

또한 추밀원부사를 지낸 김춘, 좌사부대부를 지낸 김옥, 평장사를 지낸 김연이 있다

 

조선조에는 대제학과 좌찬성을 역임한 김안국과 정국 형제가 있으며 임진왜란 전에 조선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 온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있다

또한 가깝게는 임진왜란시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18세손인 오봉 김제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