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 완산구 전동에 위치한 풍남문,
전주부성의 위치로 보면 안쪽에는 '호남제일성'이라는 현판이, 성밖에는 '풍남문'이라는 현판이 현재 걸려 있다
풍남문이 천주교 순교와 연을 맺게 되는 것은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그의 동료들이 복음 전파에 온 힘을 쏟고 있던 1790년경
1790년 9월 북경에 파견된 경기도 여주출신 윤유일(바오로)은 선교사 파견에 대한 북경 구베아 주교의 약속과 함께 조상 제사 금지라는 회신을 갖고 왔다
이로부터 한국천주교회의 순교사의 시발인 '진산사건'이 발발한다
조선조 전주는 조선의 발상지로써 조정으로부터 인정 받았으며, 전주의 '전'과 나주의 '나'를 본 딴 전라관찰사가 다스리고 있었으며
때에 따라서는 전라관찰사가 전주부사를 겸한 경우도 있었으며 전라관찰사의 관할은 현재의 전북과 전남 그리고 제주도까지 영역이었다.
(좌측으로 전동성당 돔이 보인다)
진산사건의 장본인 윤지충,
윤지충은 본디 전라도 진산군(현 충남 금산군 진산면 - 1960년대 행정구역개편으로 전북에서 충남으로 편입 됨) 출신으로
25세에 진사에 급제하고 서울로 올라가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서학을 접한다.
그로부터 얼마 후 외사촌간이었던 정약용 형제들의 지도로 열렬한 신자가 되었고 다시 그의 외사촌인 권상연에게 전교한다
1791년(신해년) 여름 진산에서 진사 윤지충(바오로)이 모친 상(권상연의 고모)을 당했는데 그는 외종형 권상연(야고보)과 상의하여 모친의 유언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전통의식인 유교식 장례와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웠다
이는 당시로 보면 조선조의 통치철학이자 정치철학이었던 유교사상과 전면배치되는 대 사건이었고,
이소식을 접한 조선조정에서는 조선에 대한 민초의 도전으로 보여져 피비린나는 천주교 박해의 구실이 되었다.
이로말미암아 윤지충은 진산군수에 잡혀 배교를 수없이 회유했으나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자
그해 윤지충과 권상연은 그 상급기관이었던 전주감영으로 이송되어 풍남문 밖, 현 전동성당 자리에서 참수되어 5일간 풍남문에 현수되게 된다.
당시에는 범죄자를 참수할 때는 성안에서 할 경우 부정을 탄다해서 성밖에서 반드시 참수가 진행하는 관행이 있었다.
따라서 앞서 소개한 성 남종삼 요한 아들 명희와 순교자 홍봉주 토마스 아들이 순교한 초록바위 성지나 순교자 조화서의 아들 성 조윤호 요셉이 치명한 서천교 성지가
모두 풍남문 밖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맥이 같다
이로써 윤지충과 권상연은 한국 천주교회사 상 맨 처음의 순교자미면서 한편으로는 천주교 교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의 시발이 되었다.
그로부터 10년후인 1801년(신유년) 천주교 박해령이 내리자 3월 호남에 검거 선풍이 일어 유항검은 대역 부도죄, 유관검, 윤지헌은 역적 모의죄로 능지처참되고
김유산, 이우집은 불고지죄로 9월 참수된다
그후 90년만에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된 그 자리에는 전동 성당이 자리를 잡아 초대교회의 굳건한 신앙을 기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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